[고전음악에 입문하시는 분들을 위한, 개인적 경험과 생각의 나눔입니다. 부족한 점이나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들께선 댓글로 그 생각을 나누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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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언어, 낯선 표현, 낯선 내용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발레’라는 항목을 찾아보면 대략 이런 말이 나옵니다.
“발레라는 예술도 하나의 언어다. 다른 예술가 마찬가지로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든 언어는 저마다의 어휘를 가지고 있다. 사막의 언어에는 놀랍도록 발달한 바람에 관한 어휘들이 있고, 에스키모의 언어는 눈에 관한 어휘의 종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해있다. 당연히 언어마다 표현을 잘 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그게 어려운 분야가 있다. 발레 역시 이 예술이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 발레는 “나는 화가 났다”거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 등의 내용을 잘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나는 사촌관계이다’라거나 ‘그는 수학을 잘한다’ 등의 내용은 표현하기 어렵다. 발레는 인간의 몸과 그 동작을 통해 표현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발레만큼이나 클래식 음악도 낯선 분야의 예술입니다. 발레만큼 낯선 방법으로, 발레만큼 낯선 내용을 표현합니다. 평소 대중가요 등을 즐겨 들으시던 분들에게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음악이라는 장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양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그게 프로그레시브든 국악이든, 모든 음악 장르는 저마다의 표현방식이 있고, 저마다 담아내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개중에는 서로 엇비슷한 것들도 있지만, 아예 서로 다른 것들도 많습니다. 국악의 시조창에서 나타나는, 마치 수묵화의 여백과도 같은 긴 호흡들과, 이를 통해 느껴지는 여유와 깊이는 다른 어떤 장르의 음악에서도 찾기 힘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만났던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친구를 만난 것입니다. 머리 속에 담고 있는 생각,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 등 모든 것이 내가 익숙한 친구들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대중음악과는 너무 “다른” 것입니다.
안내자 없는 여행
대부분의 대중음악은 가사가 있습니다. 그 가사가 듣는 이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가지고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줍니다. 가사 내용이 ‘너는 나를 버리고 떠났어’ 그러면 듣는 사람은 그에 걸맞는 감정을 가지고 공감하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고전음악에서는 사정이 매우 다릅니다. 가사가 있는 음악은 그 내용을 알기 어렵습니다. 독일어나 이태리어, 혹은 라틴어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나마 노래를 하는 가수의 음색이나 표현을 통해서 어느 정도 분위기 파악(?)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이 또한 너무 제한적입니다.
가사가 없는 순 기악곡은 더욱 문제입니다.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지, 이 곡이 표현하는 것이 하나인지 여러 개인지 조차도 파악이 안됩니다. 언어의 도움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소리의 높낮이, 길이, 셈 여림 등을 통해서만 ‘무언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낯선 곡을 들을 때는 책이나 인터넷에서 해설 등을 찾아봅니다. 그 곡의 음악적 내용 자체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그 곡에 얽힌 일화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 등을 통해서 그 음악에 다가가기 위한 조그마한 동아줄이라도 잡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이 곡엔 어떤 선율이나 동기들이 주로 사용되었는지, 그들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전체적인 구성은 어떻게 되는 지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어떤 것들이 내 마음에 닿는 지를 느끼려고 합니다.
대중가요 등에서는 이 모든 것들을 가사가 떠먹여줍니다. 그러나 고전음악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주어집니다. 한 마디로, 그냥 앉아서 들리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마도 이런 점이 고전음악을 듣는 아이들의 정서뿐 아니라 지능 발달에도 도움을 주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경험이라는 양날의 칼
이들은 듣는 사람들의 평소의 생각이나 정서에 따라서 쉽게 이해되기도 하고,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들도 있습니다. 옛날 어른들께서는 맥주를 왜 마시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피자나 햄버거를 낯설어하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특정한 향신료, 이를테면 베트남 쌀국수에 들어가는 ‘고수’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경험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상황에서는 익숙한 안내자로서 도움을 주지만, 낯선 상황에서는 오히려 방해자가 되기 쉽습니다.
한식에 익숙한 우리 조상님들이라면, ‘맛있는 음식’이라고 말할 때, 당신들께 익숙한 어떤 맛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식이 피자라고 하면, 그 한식의 맛에 대한 경험은 분명 피자의 맛을 느끼는 데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맛을 상상하기는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일반적인 대중음악들이 표현하는 정서들은 어느 정도 획일화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특히나 남녀간의 애정 문제와 그에 따르는 여러가지 정서나 기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슬프거나 괴롭거나, 외롭거나 신나거나 등등. 일상으로부터 아주 동떨어진 내용을 담은 작품들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물론 ‘모든’ 대중음악 작품들이 100% 다 이렇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들 대중음악은 ‘상업적 성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즉 ‘떠야’ 하기 때문에, 그 음악을 소비하는 대중들의 기대나 입맛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특이하고 개성적인 곡이라도, 대부분은 그 주제가 특이하다기보다는 그런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다루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이러한 대중음악에의 경험과 익숙함은 곧 고전음악에 다가가는 데 방해로 작용합니다. 대중음악에 익숙한 사람들이 고전음악을 들으면, 그 ‘낯선’ 고전음악으로부터 어떤 정서나 감동을 기대할까요? 당연히 이전에 그런 음악들로부터 느꼈던 좋은 느낌들을 기대하고, 또 그런 감동을 기대하지 않을까요?
그런 기대나 예상이 강한만큼, 그만큼 더 고전음악은 낯설게 느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부 그런 대중적 정서와 비슷한, 친숙하고 널리 알려진 곡들을 제외하면 고전음악이 표현하는 내용은 그런 기대와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특히 심오하고 위대하다고들 평하는 곡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들이 표현하는 내용 혹은 정서는 ‘이름붙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거기엔 고결함이 있고, 위대함이 있으며, 드높은 고양이 있습니다. 대중적 장르의 예술들을 통해 상상하기 어려운 그 무엇들입니다. 언어로 전달할 수 없기에 ‘불립문자’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직접 느끼기 전에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묘사하기 어려운 내용들입니다.
이런 거리는 비단 대중음악과 고전음악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전음악 내에서도 작곡가나 작품, 혹은 시대에 따라 그만한 갭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처음에 베토벤의 음악으로부터 고전음악에 입문했습니다. 처음 들은 곡들은 연주자도 없는 테잎에 녹음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과, 모짜르트의 Eine kleine Nacht Musik, 즉 세레나데 13번의 1악장, 그리고 차이콮스키의 비창교향곡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베토벤의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런 저에게 다른 작곡가들, 특히 슈베르트, 모짜르트, 바흐는 아무리 들어도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세계였습니다. 슈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표현하는 내용도, 표현하는 방식도 서로 너무 다를 뿐 아니라, 베토벤과는 너무 다른 세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짜르트는 너무 경박해’라고 제가 아는 선배와 함께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은 비단 저같은 아마추어 감상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베토벤은 그 후기 작품들에서 음악사상 전대미문의 심오하고 드높은 내용들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들은 세계 최고의 수준을 구가하던 당시 비엔나의 음악 평론가들에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베토벤이 병들고 나이들어 제정신이 아니라서 이런 곡조차 써냈다”고 평하기조차 했습니다.
저마다의 시선
헤르만 헷세의 소설 ‘황야의 늑대(Steppenwolf)'에 보면 마술극장에서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 하리 할러와 ’그의 젊은 날의 신, 평생 그의 사랑과 숭배의 대상‘이었던 모짜르트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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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모짜르트)는 지휘를 하듯이 두 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달 아니면 희뿌연 별 같은 것이 어디선가 떠올랐다. 나는 관람석 난간 너머로 측량할 수 없이 깊은 공간 속을 들여다보았다. 안개와 구름이 흐르고 있었고, 산줄기와 해안이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발 밑에는 황무지 같은 평원이 천지에 광활하게 펼쳐졌다. 이 평원에서 우리는 수염을 길게 기른 성스러운 외관의 노인을 보았는데, 그 노인은 고통에 찬 얼굴로 검은 옷을 입은 수만 명의 남자들의 거대한 행렬을 이끌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초췌하고 낙담한 표정이었다. 모짜르트는 말했다.
“보게나. 저 사람이 브람스라네. 그는 구원을 갈구하고 있어. 그러나 그러기엔 아직 멀었다네.”
나는 그 검은 옷을 입은 수만의 사람들이 브람스의 작품 가운데서 신이 쓸모없다는 판단을 내린 선율이나 악보를 연주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악기를 너무 많이 사용했어. 재료를 너무 많이 낭비한 거야” 모짜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그에 이어서 우리는 똑같이 대규모 군중의 선두에 서서 리하르트 바그너가 행진해 오는 것을 보았다. 수천의 사람들이 그에게 매달려 젖이라도 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고행자의 지친 걸음으로 다리를 끌다시피 하며 걸어왔다.
“제가 젊었을 때는 이 두 음악가가 서로 극명한 대립을 이룬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모짜르트가 웃었다.
“그래. 언제나 그런 거야. 얼마간 떨어져서 보면 그런 대립이란 것도 서로 점차 비슷비슷해지는 법이지. 그건 그렇고 악기를 너무 많이 쓴 것은 바그너의 개인적인 잘못도, 브람스의 잘못도 아니야. 그건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과오지”
“네? 그럼 그 과오 때문에 저들이 저렇게 무서운 참회를 해야 하나요?” 나는 항의하듯이 소리쳤다.
“물론일세. 그것이 심판의 순서지. 그들이 먼저 시대의 죄를 다 씻고 난 후에야, 결산을 보아야 할 정도로 아직도 개성적인 것이 남아 있는지 여부가 밝혀질 거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7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김누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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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짜르트는 헤세 자신의 ‘젊은 날의 신, 평생 그의 사랑과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브람스나 바그너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들에는 모짜르트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과는 다른 악기, 다른 방식이 요구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톨스토이의 경우는 더합니다. 그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는 베토벤의 음악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차이콮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던 그가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보물 창고
하지만, 이들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고전음악들이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되는 것은, 그들이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 누구에게나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가서기 어려운 것은 그들 스스로 어떤 장애를 설치하거나 문을 닫아 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평소 익숙한 문화나 정서와 너무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아주 쉽게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경우가 영화나 드라마, 혹은 광고에서 곡이 사용되는 경우입니다. 'Out of Africa'에서의 모짜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의 2악장, 어느 커피 광고에 쓰였던 비오티의 바이올린 협주곡 22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인가 하는 책을 영화로 만든 데 쓰인 브람스의 교향곡 3번 3악장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그 외에도 숱한 예를 들 수 있습니다만, 이들이 시사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영화 등의 어떤 장면이 빚어내는 독특한 분위기 - 이런 것이 그 곡을 모두 표현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마음 속의 조그마한 문 하나를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낯선 세계에 조그마한 등불을 비춰주는 것이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런 축복된 만남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한정된 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편적 정서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시간이 적게 걸리거나 오래 걸리거나 등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러한 경험이나 감동은 항상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들과 문화유산들이 공유하는 특질인 ‘보편성’,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다는 점은 음악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감동의 샘물들은 지금도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꽃씨 뿌리는 마음
이 낯설지만 풍요로운 세계, 고전음악에 다가가는 최선의 길은 기다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밭에 씨를 뿌리고, 계속 물을 주면서, 언젠가는 따뜻한 볕과 온묘로운 바람이 그 잠든 씨앗을 틔워 꽃을 피울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곡에게도 자신에게도 충분한 기회를 주면 음악은 언젠가는 그 위대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 보일 것입니다.
자꾸 들음으로써 그 표현 방식에 익숙해지고, 짧지 않은 곡의 전개나 흐름에 익숙해지면서 음악은 한 발씩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한 뼘씩 우리에게 그 풍요로운 가슴을 열어줍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의 일입니다. 급우로부터 테잎을 하나 빌렸습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세광출판사에서 나온 검은 색 책을 제 안내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제목이 ‘세계 명곡 해설’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악보조차 없는 해설서였지만, 그래도 나름 명곡들이라는 곡들로 채워졌으니, 각 곡마다 극찬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명곡이니만큼 어느 정도 들으면 당연히 이해가 될 줄로 기대하며 열심히 들었지만,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둔감한 음악적 감성을 탓하며 그 곡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가을 날 오후,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전형적인 맑고 화창한 가을 날씨였습니다. 부산의 서면 부산상고 앞에 있던(지금도 있는 지는 모릅니다) 육교를 2/3 쯤 걸어내려 올 때, 갑자기 머리 속에서 ‘봄의 제전’ 2부의 그 원색적인 멜로디가 울리는 것입니다. 마치 길을 가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그렇게 그 리듬이 머리 속에서 울리며,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생경한 느낌이 전해졌습니다. 그 날, 그 시간의 그 느낌을 저는 아직까지 바로 조금 전이었던 듯이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경험이 제게 이해가 잘 안되는 곡들을 대할 때의 제 대응방식을 알려주었습니다.
충분히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듣습니다. 그리고는 언젠가 내릴 봄비를 기다리며, 마음 속에 묻어둡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꽃이 핍니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신을 계속 가꾸어가는 모든 분들의 가슴 속에 음악의 꽃들이 만발하기를, 그 ‘푸른 꽃’이 찬란히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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