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출근길엔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지난 밤 대화방에서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동안 게시판에 올라왔던 수많은 이야기들
그와 함께 떠올랐던 숱한 영상들, 음악들...
한 순간, 닫힌 멍울이 터지면서 꽃잎이 모습을 드러 내듯 떠오르는 것은 자유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베에토벤의 후기 작품들 속에서 자유의 날개들이 퍼득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들 음악에서 느껴왔던 수많은 상념들이 함께 소용돌이 치면서, 때로는 뒤섞이고, 때론 꼬리를 잇고 하면서 이제까지 보여왔던 모습과는 또 다른 형태를 취하는 것이 보였다. 분명 라디오에는 다른 작곡가의 다른 작품이 연주되고 있었는데 머리속을 휘도는 것은 베에토벤의 음악이었다.
베에토벤의 후기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자유는 두가지 모습을 가진다. 하나는 음악 언어의 모든 것을 지배한 자의 자유, 자신의 음악적 아이디어와 정서를 표현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구사하여 자신이 그리고자 한 것을 오롯이 그려 낼 수 있는 그런 자유이다. 그 이전에 누구도, 어떤 표현수단을 통해서도 이룩하지 못했던 이미지를 그려 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자유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심상이 앞서 나가고, 그 발자취를 음악적 언어가 고스란히 소리로 그려 보여준다.
다른 하나의 자유는, 그렇게 자유롭게 표현된 이미지들이 표현해 내는 베에토벤 내면의 생명이다. 때론 여리고 섬세한 손길이 매듭을 풀듯이, 때론 거칠고 억센 손이 동앗줄을 억센 손으로 끊어 버리듯이, 혹은 지표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 용암이 솟구쳐 오르듯이, 그의 음악에 서는 그 표현수단보다 더욱 자유로운 정신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인습과 제도, 역사와 사회가 자신의 틀 안에 억지로 끼워 넣어 뒤틀리고 일그러진 인간의 고결한 정신이 자신을 옭아 매었던 사슬들을 끊어 내고 본래의 모습을 오롯이 되찾는다. 베에토벤은 가장 깊은 것과 가장 높은 것, 그리고 가장 거센 것을 동시에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표현수단을 사용하여 이들을 자신이 본 모습 그대로 다시 그려 내는 데 성공했다.
때로는 거칠게 터져 나오는 만하임 로켓으로 억제할 수 없는 생명의 약동이 그려진다. 가장 여린 뿌리 하나라도 제대로 일구어내기 위하여 둘레를 더듬어가며 흙 알갱이 하나 하나 헤쳐가는 심마니의 손길처럼, 그의 아다지오는 그렇게 머뭇거리고, 맴돌고, 추스려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가장 여리고 작은 촉수만이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속내를 들추어 낸다. 그의 두 눈은 항상 밤 하늘을 쫓았다. 그 가슴이 갈구하는 가장 성결한 바램이 닿아 있는 저 멀고 희미한 별빛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 눈빛이 담고 있는 간절한 염원과 성스러운 교감, 그리고 이를 통해 전해지는 드높은 계시와 인간 정신의 고양을 더 할 수 없이 정제된 언어로 고스란히 전달한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장엄미사의 베네딕투스에서 그토록 고요하고 확신에 찬 음성으로 지고의 존재를 향한 찬가를 불렀으며, 그의 가슴에 어떤 손길이 닿았길래 억누를 수 없는 법열의 비상이 리디아 선법의 날개를 달고서 우리 마음을 함께 드높이는 것일까. 9번 교향곡이나 햄머 클라비어를 비롯 한 후기의 피아노 소나타들, 현악 사중주들의 스케르쪼에서 약동하고 휘몰아가고 포효하는 그 생명력은 도대체 어디서 솟아난 것일까. 마치 흙탕물이 가라 앉으며 조금씩 물이 맑아 지듯이, 그래서 끝내 모든 앙금이 가라 앉고서 그 투명한 물빛이 드러나듯이, 그의 아다지오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씻어 내린다. 오로지 자유로운 정신만이 자유로운 눈길을 줄 수 있다. 오로지 자유로운 정신만이 자유롭게 느낄 수 있다. 그 자유를 획득하는 것도, 그 획득된 자유를 함께 나누는 것도 모두 천재이다.
모짜르트는 인간의 기적이었다. 그의 감수성은 비길 데가 없었으며, 그의 눈길이 닿지 않은 곳 또한 없었다. 그는 마치 세상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자유로운 공기처럼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보았고, 그의 눈길이 한 번 닿은 것은 무엇이나 그의 정신에 온전히 그 모습 그대로 각인되었다. 그의 마음은 천개의 눈을 갖고 있어서, 어린아이가 보는 모습이나 고희의 노옹이 주름진 눈길에 담아 내는 모습, 설레는 가슴의 처녀 눈길에 들어오는 모습이나 난봉꾼의 눈에 비치는 모습 이 모두를 그는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는 쉴 새 없이 경탄하고, 찬미하고 탄식하며 눈물 흘렸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이 본 모습을 그려 내는 데는 그 대상이 제 아무리 오묘하고 복잡한 것이라도 한마디 이상의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몇 개의 음표만으로도 그는 듣는 사람을 마법에 걸어서는 그가 본 모든 것을 고스란히 함께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나의 꽃잎이 돋아나고, 피고, 진다. 그 설렘과 기쁨과 탄식과 허무가 단지 몇 개의 음을 통해 그대로 우리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러나, 모짜르트는 어디서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돋아나는 싹에 물을 주고, 함께 머물며 비와 바람을 맞고, 그 여린 뿌리들을 손끝에 흙 뭍히며 느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저 높은 곳을 비상하였다. 너무도 정확한 음정때문에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하여 항상 템포가 빨리 갔다는 하이페츠처럼, 아마도 그가 조금만 더 오래 머물러 응시를 했더라면 그의 가슴은 감당할 수 없는 아픔에 아마도 터져 버렸을 지도 모른다. 모든 아픔은 그 끝이 같고, 진실은 언제나 차마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제 아무리 밝고 아름다울지라도. 하지만, 타고르가 기탄잘리에서 표현한 것처럼, 고통이 문을 두드리며 전하는 메시지는, 어둠과 정적 속에서 비밀스럽게 만나야 할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모짜르트는 공중을 요정처럼 떠돌고, 베에토벤은 대지를 걷는다. 이른 새벽 풀잎에 맺히는 이슬이 그의 옷깃에 묻어나고, 보드라운 흙길의 감촉이 그의 발끝을 통하여 가슴으로 전해진다. 때론 쭈그리고 앉아서 풀포기를 들여다 보기도 하고, 때론 커다란 등걸의 뿌리를 따라 흙을 파내려 가기도 한다. 바하는 저 높은 산정에 홀로 우뚝 버티고 서 있다.
그의 발길이 닿아 있는 곳은 저 높은 존재를 향한 신성한 제단이다. 그는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봄과 동시에 저 아래 펼쳐진 드넓은 대지도 함께 굽어본다.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신성하고 놀라운 광휘는 그가 굽어보는 대지 위에서 그 영광을 드러내고, 바하는 그 빛이 비추는 곳을 따라가며 쉼 없이 그 영광스런 기쁨을 그려 내었다. 그가 작곡한 가장 비통하고 어두운 음악조차도 그 성스러운 영광의 광휘를 드러내기 위한 도정에 불과할 따름이다. 베에토벤이 키리에나 아뉴스데이에서 가슴을 쥐어 뜯으며 신을 향해 호소할 때, 거기서 드러나는 인간의 간절한 염원은 그 자체로서 인간의 모습이고, 다른 어떤 것에 종속된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존재 가치를 가진다. 인간의 모습 그 자체가 베에토벤의 관심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바하의 경우에는 그 모든 것이 다른 존재를 전제한다. 절대자의 구원과 영광, 이것이 있기에 인간의 슬픔도, 추한 모습도 그 표현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소크라테스를 접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이데아론이었다. 진도가 조금 더 나가서 스피노자를 만났고, 그는 에티카에서 속성과 양태를 정의했다. 이를테면, 꽃이라는 존재는 아름다움의 속성의 하나로서 존재하며,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은 꽃이나 음악 등의 양태로 실재한다는 식이었다. 모든 형이상학은 그 나름의 한계를 지니고, 그래서 후세의 이론에 반드시 반박을 당한다. 하지만, 그 나름의 인식의 틀이 시사하는 바는 어린 나에게 충분히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그 뒤로 많은 사고가 같은 맥락의 틀에서 진행되었음을 기억한다.
이 틀을 그대로 다시 사용한다면, 그리고 약간 더 확대시킨다면, 이런 이야기가 가능해 질 것 같다. 모든 속성은 다시 그것을 또다른 속성으로 나눌 수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은 스피노자의 정의와는 좀 동떨어진 것이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아름다움도 다시 그 표현 대상에 따라 좀 더 나뉘어 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바하, 모짜르트, 베에토벤, 이들의 음악은 모두 나름 대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 속성의 공통 분모는 대중 음악 부류의 속성과 그 궤를 달리한다. 속성이란 말은, 바꾸어 말하면 표현 대상, 그리는 세계가 될 것이다. 속성이 다른 이상, 그 표현 대상이 똑 같은 자유라는 단어가 될 지라도, 그 자유라는 '수식어'가 적용되는 대상과 정도는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예술의 속성은 진리이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모든 예술 작품들의 속성은 자유이기도 하다.
진리를 제대로 아는 일은 쉽지 않다. 자신의 예술 작품을 통하여 진리를 밝힌 사람들은 모두 험하고 한적한 길을걸었다. 내가 롯시니의 음악을 즐겨 듣지 않는 이유는 그 음악이 전해 주는 바가 단지 귀에 느껴지는 즐거움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즐거움은 다른 어떤 매체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오로지 그 음악을 통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무언가가 희박하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 무언가를 위해 과도한 노력을 기울일 가치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라디오 같은 데서 흘러 나오지 않으면, 직접 찾아서 듣는 일은 거의 없다. 롯시니는 천재였으나, 그는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 아부한는 데에 거진 탕진해 버리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헤세가 "황야의 이리"에서 베에토벤과 브람스에 대해 평가한 내용 또한 그 정당성은 작가의 음악적 소양과 판단력에 대한 검증 결과에 종속된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차이코프스키의 영광은, 김영삼이 미대 대학생의 소묘 작품을 보고 훌륭하다고 찬탄했을 때 그 대학생이 느낄 수 있는 영광과 거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톨스토이의 음악에 대한 생각 또한 음악의 빙산의 일각만을 보고서 판단한 단견이라 확언할 수 있다. 마치 두세편의 영화를 보고서 영화 전체를 매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더우기, 크로이쩨르 소나타에 대해 어느 음악가나 애호가도 동류의 평가를 내린 경우를 찾아 보지 못함에랴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다.
헤세의 경우, 베에토벤이나 브람스를 가리켜 '음표를 낭비했다'고 말하고선, 그들이 자신들이 남용한 음표의 사슬에 매여 힘겨워하는 모습을 주인공 하리 할러에게 보여준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모짜르트는 간결하고 짧은 악구로서 전체적인 정경을 한눈에 파악되도록 그려 내는 데는 누구도 따라갈 자가 없다. 그러나, 베에토벤이나 브람스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들, 그들의 음악의 속성은 모짜르트의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런 차이점을 간과한다면 혹시 헤세의 주장이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을 지 모른다.
빠삐용이 젊음을 탕진한 죄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기 위해 치른 댓가는 영화가 보여준다. 그러나, 젊음을 탕진한 빠삐용이 감옥 안에서 보여 주는 수인의 모습이 과연 우리들 자신의 모습과 그렇게 많은 차이가 있을까. 역사와 인습과 제도, 사회화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갖히고 보이지 않는 사슬로 얽매인 일그러진 우리들의 모습, 우리가 생존을 위해 해야 하는 모든 일들이 과연 보이는 벽에 갇힌 빠삐용과 얼마나 다르며 생존을 위해 바퀴벌레라도 먹어야 했던 처지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유일하고 일회적인 인간의 존재가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모습과 속성 그대로를 유지하고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전제 하에, 그런 현실의 감옥과 족쇄에 갖혀 일그러진 자아의 본모습을 회복하고 해방시키는 것을 사람들은 '인간 회복' 등의 말로 부르는 것 같다. 이를 개인의 영역에 한정시켜 자아회복이라고 부를 때,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 과정을 저해하는 요소가 마치 감옥의 담벼락처럼 주위에 둘러쳐져 있음을 발견하면 누구나가 놀라게 된다. 더우기 생존의 타성을 비롯한 우리 내부의 적까지 생각하면 어떨 때는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마치 아무 것도 없는 듯이도 보인다. 까뮈가 말하는 부조리한 현실이란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호흡을 곤란하게 만든다. 까뮈가 죄가 아니라,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이, 의식하고 살지 못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의식적인 인간(까뮈의 표현을 빌자면)이 그것을 고통과 함께 깨닫는 동시에 시작하는 것은 그에 대한 저항이고 탈출이다.
1998.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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