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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penwolf

음치의 축복

by Amadeus 2008. 10. 22.

1. 첫번째 기억

 

아마도 국민학교 5학년 겨울이었던 듯하다. 나는 성당에 다니고 있었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되기 좀 전이었다. 다들 그러하듯이,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어린이들은 어린이들 대로 성탄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가 다니던 주일학교에서는 성가대를 꾸렸다. 나는 알토 파트에 배정이 되었고, "아름다운 장미"라는 노래를 배웠다. 다른 노래도 배웠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날, 아마도 두번째나 세번째 연습때였던 듯 하다. 합창 지도를 하시던 수녀님께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유심히 들으시더니 나를 가리키며 나와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혼자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셨고, 나는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불렀다. 내 노래(?)를 들으시던 수녀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면서 말씀하셨다. "어머, 너 음치구나~!"

 

그 날이 어떻게 흘러갔는 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다음 주일부터, 나는 헌금을 가지고 땡땡이를 쳤다. 성당을 가지 않고, 만화방을 들렀다. 나중에 발각나서는 부모님께 죽도록 얻어터졌다.

(그 수녀님을 비난하지는 말기 바란다. 오늘날 우리들이 기대하는 그런 배려가 없더라도 세상은 모두가 아름답게 돌아갈 줄 알고 있었던, 순진하기 짝이 없으셨던 분들이었기에, 그런 말씀이 아이에게 마음의 상처가 될 것이라는 등의 복잡한 생각을 하실 줄 몰랐기 때문이다.)

 

2. 두번째 기억

 

중학교 1학년때 처음 맞는 음악 수업 시간이었다. 항상 불콰한 모습으로 들어오셔선 흥에 겨우시면 "라스파뇨라"를 멋지게 불러주셔서 아이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킨 선생님이 음악을 맡고 계셨다. 그 날, 첫 시간이라서 그랬는지, 한 명 나와서 노래를 불러보라 하셨다. 왜 그랬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조금 지명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나를 불러 일으켜 세워선 내가 교탁에 서게 되었다.

 

나는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김정호의 "하얀 나비"를 나름대로 있는 분위기 없는 분위기 다 잡고 불렀다. 서너마디 불렀을까....선생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염불하나? 치와라, 마~~~!!!" 나는 죄 없는 뒤통수를 긁으면서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 뒤로 다시는 내게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친구가 없었다.

 

이 무렵의 나는, 피아노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건반과 가장 왼쪽에 있는 건반의 소리조차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3. 세번째 기억

 

복학을 하고도 시간이 좀 지난 어느 때였다. 아마도 동아리 행사의 뒤풀이였나보다. 중국집이었고, 약 스무명 가량이 상에 둘러 앉았던 듯 하다. 가끔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날 그랬다. 잘 돌아 가다가, 어떤 후배 여학생 하나가 수줍어하면서 자신은 못하겠다고 자꾸 뒤로 빼었다. 몇 번 달래고 을르던 동아리 회장 녀석이 마침내 최후의 칼을 뽑아들었다.

 

"너 자꾸 개기면 대신 용원이형 시킨다!"

 

잠시 소란이 일어나고, 응급차가 달려와 서클 회장을 실어갔다는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겠다. 그 당시의 나는 동아리에서 말하는 소위 오해투의 핵심 멤버였다. 오선지 해방 투쟁 위원회!!

 

4.

 

고등학교 2학년 여름, 7년간 혼자 앓아오던 짝사랑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메꿔 줄 무언가를 찾아 보았다. 모두들 바로 바닥이 보이고,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이 없어서 차마 건드리지 못했던 두 개의 영역에 발을 들이 밀었다. 철학과 음악이었다.

 

철학은 그래도 말귀나마 알아 먹으니까, 덕분에 그 해 말 발간된 교지 창간호의 논단에 나의 첫(그리고 마지막) 철학 논문(!!)이 실리는 결실을 낳았다.

 

하지만 음악은 아니었다. 들어도 들어도 무슨 소리인 지 모르겠다. 처음에 테잎 하나로 시작했는데, 그 유명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실려 있었다. 표지를 보니, 운명 교향곡과 함께, 모짜르트의 "Eine kleine Nacht Musik"이 같이 실려 있었다. 그러면 곡이 최소한 다섯 곡이 되어야 하는데, 이건 아무리 들어도 네 악장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테잎을 만드는 회사에서 실수로 겉표지를 잘 못 프린팅 한 것이라고 혼자 결론지었다.

 

아주 아주 나중에, 서점에서 우연히 본 어느 음악해설서에 "운명 교향곡은 3악장과 4악장이 끊이지 않고 연이어 연주된다"는 말을 보고서 혼자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나는 뻔뻔하게 "나는 고전음악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 당시에 음악에 아주 소질이 있던, 나로서는 하늘에 계신 분과 거의 동급의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당시에 이미 밴드를 결성해 활동을 하고 있었던 친구였다. 그 친구 왈, "운명 교향곡인지 나발인지 들어 보니까 뭐 처음부터 끝까지 웅~~~ 쾅!! 웅~~~ 쾅!! 하다가 말데? 그게 무슨 음악이냐? 뭐가 좋다는 건지 이해가 안가네."

 

그래, 이해가 안가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바로 그 이해가 안간다는 점이 나로 하여금 여기엔 다른, 한 번 맛보면 바로 그 밑바닥이 들여다보이는 것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음치였기때문에, 이해가 안가는 것은 내가 부족해서이지, 음악 자체에 문제가 있거나 별볼일 없는 음악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고서 이해 될 때까지 "무식하게" 들을 수 있었다.

 

5. 다른 곳에 썼던 글의 일부

 

대학 2학년 초엽, 나는 봉천동의 어느 허름한 자취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창문이 바로 골목길에 붙어 있어서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한 나는 밤마다 잠이 드는 데 어려움을 겪곤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수면제 음악들을 사용하여 다른 잡소리들을 중화시키는 것이었다. 가급적이면 길고, 또 이해가 안되는, 잠 안오는 음악들을 적당한 크기로 틀어놓고선, 그 음악을 이해하려고 집중하여 노력하면 나는 어느새 잠이 들곤 했다.

 

베에토벤의 장엄 미사, 현악 사중주들 등등 온갖 좋다는 음악들은 모두 수면제로 사용되었다. 90분 짜리 테잎에 녹음을 하여 듣다 보면 한 곡이 약 보름 정도는 버텨 주었다. 자꾸 듣다 보니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잠드는 시간이 늦어지고, 끝내는 테잎을 뒤집거나 갈아끼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때 쯤이면 수면제는 더 이상 수면제가 아니라 각성제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슈만이 '장 파울의 네권짜리 장편소설처럼 천국적으로 길다'라고 평한 슈베르트의 9번 교향곡이었다.

 

질풍 노도의 시기에, 베에토벤이 삶의 우상이었던 그 시기에, 슈베르트의 그 따뜻한 시정과 낭만성은 내게 이해되기 어려운 그 무엇이었다. 교향곡은 무조건 투쟁적이어야 하고, 격정과 열광의 회오리를 동반한 폭풍우가 되어야만 했다. 음악의 진행은 완전히 기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즉 곡의 진행에 충분히 익숙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이 곡을 왜 좋다고 하는 지 이해가 안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 무렵의 나는 완전히 베에토벤의 점령지였다. 그래도 남들이 명곡이라 하니, 천부적인 음치인 나로서는 좀 더 노력을 해야만 이 위대한 작품이 제대로 이해가 되리라. 그래서 테잎을 내던지지 않고 계속 "무식하게" 들었다.

 

음치가 한 곡을 어느 정도라도 감을 잡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소위 명곡들이 내 머리 속으로,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5.

 

이제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좀 해 보자. 베에토벤이 영웅이나 운명 교향곡을 처음 연주했을 때, 그리고 현악 사중주 14번을 초연했을 때, 비엔나의 음악 비평가들의 평은 냉담했다. 그들은 베에토벤의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 이미 시대를 반세기는 앞 서 나가고 있었고, 오늘날에는 현악 사중주라는 장르의 최고의 걸작이라고까지 꼽히는 14번에 대해서는 "베에토벤이 귀를 먹더니 이제 맛이 가서 이런 곡까지 음악이라고 만들어낸다"라는 요지의 평을 했다고 기억한다.

 

과연 이들이 오늘날의 지적 수준에는 형편없이 뒤떨어진 이백여년 전의 사람들이고, 그들이 무능해서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일까? 어쩌면 그런 면도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의 비엔나는 서구 음악 세계의 중심지였고, 그 곳에서 활동하던 비평가들은 당시 최고의 음악적 식견을 자랑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음악적 재능과 역량을 오늘날의 전문가들과 비교했을 때 결정적인 판단을 그르칠 만큼 그렇게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물론 현대음악을 제외하고 하는 이야기다.

 

약 100Kg의 무게를 가진 쌀가마라면, 힘이 센 사람은 한 번에 들어올릴 지 모르겠다. 나같은 약골은 용만 쓰다가 포기하고 말겠지. 이 대목에서는 힘이 센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확연하다. 하지만, 100Kg이 아니라 1000Kg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0000Kg이라면...여기서는 힘이 센 사람과 약한 사람의 차이는 없어진다. 그들의 힘이라는 것이 애초에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갓 태어난 아이나, 역발산 기개세의 항우나, 여기서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베에토벤의 음악부터, 이제 음악은 더 이상 연주회장에서 한 번 듣고 바로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영역에서 벗어나 버렸다. 전문가들조차 여러 번을 거듭 들어야 겨우 이해가 되는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걸로도 부족한 곡들이 나타났다. 그 이전의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작품들, 그와 동시대의 모든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들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공유하던 패러다임을 고수하였고, 전문가들이 한 번 들어서 제대로 감정을 하지 못할 작품이란 없었다(이 말을 모짜르트의 음악은 한 번 듣고 제대로 다 이해가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말기를 바란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짜르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베에토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경우가 있다 - 이 둘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를 포함한다). 하지만 베에토벤은 달랐다.

 

겁나게 힘이 센 사람이 천톤짜리 물건에 대고 열심히 용을 쓰다가 "이건 움직일 수 없는 것이야"라고 결론을 내리고 되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음악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과 역량으로 한 번 듣고 판단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음악의 힘센 사람들도 베에토벤의 음악을 한 번 듣고 "이건 아니야"라고 선고를 내려 버린다.

하이든의 교향곡 하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전문가 정도면 한 번 듣는 것으로 족했으리라. 아마도 나같은 음치는 열번은 들어야겠지만. 하지만, 에를 들어, 베에토벤의 현악 사중주 14번 정도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문가는 100번을 들어야 할 것이고, 나같은 음치는 150번은 들어야 하리라. 하지만, 자신감에 차 있는 전문가는 결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음악을 열번 이상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리라. 이미 그 전에 어떤 식의 선고를 내리겠지. "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웅~~~ 쾅!! 웅~~~ 쾅!!만 하다가 끝나고 말아."

 

하지만, 바보 이반처럼, 무지한 음치는 무식하게 음악을 듣는다. 이해될 때까지.

 

6.

 

중3 첫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친구에게서 국화 모종을 세개 얻었다. 그걸 집 마당에 심고서는, 매일같이 돌보았다. 그 당시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서 뒷산을 다녀와서는 학교 가기 전까지 온통 꽃밭에 매달렸다. 학교까지 걸어서 삼십분이었는데, 매일같이 지각을 해서 지각 대장이 되었다. 여름에 꺽꽂이를 세 번 해 주니, 꽃밭이 모두 국화로 뒤덮혔다. 남쪽 지방이라 꽃은 더디게 피었다. 여름과 가을 내내 꽃밭에 붙어 앉아서 진딧물을 잡아주고 가지를 다듬고 하였다.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꽃이 피었다. 손바닥보다 더 큰 하얀 국화들이 꽃밭을 가득 덮었다. 동네 사람들이 구경하러 다녀가곤 했다.

내게 모종을 건네 준 그 친구 집에는 갓난 아기 손바닥보다도 더 작은 국화들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7.

 

친구들이 나에게 책을 한 권 내라고 농반, 진반으로 이야기한다. 책 제목은 "이렇게만 하면 음치 완전히 극복한다". 사실 음치를 극복하는 데는 음악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기타를 배운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것도 그나마 이십대 후반에야 가능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 시기를 감사한다. 그렇게 백번, 이백번을 들어야 겨우 제대로 이해가 되는 음악들 덕분에, 음악이 긍극적으로 인간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음악을 통해서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세계가 어떤 것인 지를 제대로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세계를 체험하는 것은, 오로지 그런 곡들, 사귀는 데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드는 그런 친구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친구들이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곁에 머물러 힘이 되어주는 것처럼, 이런 음악들 또한 어떤 짙은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빛으로 삶과 세계를 밝혀준다.

 

물론, 언제까지나 새로운 곡을 사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제는 웬만한 곡이면 한 번 들으면 그 곡의 구조까지 눈에 들어온다. 처음엔 백번을 들어야 들리던 것들이 서른번, 열번, 다섯번...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이제는 대략 한 번 정도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한 번 들어 이해가 어느 정도 된 음악일지라도, 결코 그걸로 못을 박아 버리는 일은 없다. 위대한 예술 작품 앞에 얼마나 겸허해야 하는 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작품이란 자신이 자라는 만큼 함께 커지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음악을 전공한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작곡을 전공하고 작품을 쓰는 사람들 조차도 자기 자신의 재능과 역량에 대한 확신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참으로 가치롭고 위대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사례들을 많이 본다. 그들이 조금만 더 겸허한 마음으로 음악에 귀를 기울이면 어떨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 본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음악은 씨앗이고, 사람은 토양이다. 모든 씨앗이 모든 토양에서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꽃을 피운다고 해서 모두 아름답고 커다랗게 피는 것만도 아니다. 아름다운 꽃의 씨앗이 그 꽃을 제대로 피우기 위해서는, 좋은 토양이 있어야만 한다. 모름지기 어려운 꽃일수록 가꾸기 어렵고 자라는 환경에 대한 조건이 까다롭지 않은가.

 

오랜 세월동안 명곡이라 회자되었던 곡들, 명반이라 칭송받는 것들이 자신에게 들어오지 않을 때에는 먼저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나는 저 꽃을 피울 준비가 충분히 된 토양인가? 계속 개간하고, 잡초를 뽑아주고, 거름을 주며 돌보았던가? 어떤 비옥한 땅일지라도 정성스럽게 돌보아야만 그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꽃들이 있다. 꽃씨가 떨어져 싹을 틔우지 않는다고, 싹이 터도 꽃이 피지 않는다고, 꽃이 피어도 보잘 것 없어 보인다고 꽃씨를 나무라지 말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대학 1학년 어느 봄날, 교정의 잔듸밭에 앉아서 학교 음악 감상실에서 DJ를 하는 선배 누나에게 "모짜르트는 너무 경박해"라고 말하고, "그래, 맞아"라는 응답을 듣던 순간이 생각난다. 나는 당시 베토벤 교의 교도였고, 그의 음악에 관한 확신은 흔들릴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나는 겨우 그의 중기의 작품들이나 어느 정도 감상하는 정도였고, 그나마 지금 돌아보며 얼마나 부족한 지를 생각하면 고소가 머금어진다. 그로부터 이십여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제 이야기한다. "바흐와 모짜르트, 그리고 베에토벤이 서양 음악을 받치는 세개의 솥발이다."라고. 이십년 후의 나는 또 어떻게 생각이 달라질까?

 

뭔가 희귀하고 신기한 것, 대단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누구에게나 힘든 길을 계속 걸을 수 있게 해 준 음치의 축복에 감사한다. 그 마음이 그대로 이어져, 설령 오늘 잘못된 생각이 있어 몇 년 후, 혹은 이십년 후 이 생각을 다시 바꾸는 일이 있더라도, 항상 자신을 돌아봄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 "그래도 당시에는 자만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성실함과 최선을 다해 내린 판단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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