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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penwolf

풍란

by Amadeus 2008. 10. 15.

얼마 전에 집안에 굴러 다니는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풍란에 관해 쓴 글을 하나 보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풍란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풍란과 함께 엮여 나온 생각을 쓴 글이었다. 그 글을 쓴 시인은 자신을 풍란과 같다고 했다. 풍란의 뿌리 가운데 일부는 흙이 아니라 공기중으로 뻗어 있고, 그 희박한 공기에서 뭔가를 흡수하여 그렇게 향기로운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풍란을 본 적이 없다. 따라서 풍란의 향기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풍란의 뿌리 가운데 일부가 흙이 아니라 공기중으로 뻗어 있다는 것이고, 풍란의 향기가 매우 아름답고 짙다는 것이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풍란의 모습을 그리다가 문득 풍란의 모습에 다른 개념을 이입해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고전음악을 듣고, 극장 대신 미술관을 찾으며 베스트셀러 대신 곰팡내 풍기는 소위 명작들을 찾아 다니는, 그래서 회사에서건 술자리에서건 함께 이야기 나눌 사람 하나 찾기 힘든 그런 나의 모습은 어쩌면 풍란과도 닮지 않았을까?(그렇다고 해서 내게도 풍란과도 같은 그런 아름답고 짙은 향기가 있다는 몽상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런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어쩌면 풍란과 닮지 않았을까?

마치 풍란이 그 뿌리를 뻗은 허공처럼, 내가 사랑하는 음악도, 미술도, 문학도 나의 뿌리가 닿아 있는 허공과 같은 것은 아닐까? 풍란의 뿌리들은 흙으로만 뻗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기로만 뻗은 것도 아니다. 그 뿌리가 닿은 곳이 다를진댄, 그 뿌리로부터 흡수되는 자양분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조건이 유일하지 않듯이, 사람들 각자도 하나의 뿌리만이 있지는 않을 것이고, 그러한 일상과 삶의 뿌리들이 그 사람에게 공급하는 자양분 또한 한결같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이 다른 이상, 같은 곳에 뿌리를 내린 듯이 보여도 그 사람의 삶의 궤적으로 패인 물길은 아마도 각기 다른 무언가가 타고 오를 것이다.

정원수가 가지치기를 당하듯, 이 시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때론 자의에 의해서, 때론 타의에 의해서, 때론 무감각하게, 때론 살을 저미는 통증을 느끼면서 그 뿌리가 끊겨져 나가고, 혹은 퇴화되거나 고사한다. 동물적 생존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몇개의 뿌리만 남기고 모두 거세당한 모습들도 보이고, 오로지 형태만 남아 그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을 상상하며 아쉬워하게 하는 모습들도 보인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가리키며 그 사람이 건강한가 하고 묻는다면, 이들 뿌리의 건강함이 그 삶의 건강함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풍란만이 가진 그 독특하고 짙은 향기가 과연 흙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니면 공기로부터 오는 것일까? 나는 그 대답을 모른다. 아마도 그 두가지 모두가 풍란의 내부에서 향기로 탈바꿈하는 것이겠지 하고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어설픈 추측을 해 볼 따름이다. 하지만, 성기디 성긴 허공 중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뿌리들이 없다면, 풍란의 향기가 이처럼 짙고 풍요로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일 사람에게도 향기가 있다면, 그 향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서도 나는 분명히 이렇다, 혹은 저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적어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 사람의 삶의 자리에 어딘가 희박한 곳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뿌리들이 없다면 이런 저런 향기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는 성긴 곳이 있고, 촘촘한 곳이 있다. 촘촘한 곳은 발을 딛고 몸을 가누기가 쉬워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지천에 그런 자리가 널려 있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촘촘한 자리이고, 책을 읽는 것은 성긴 자리이다. 같은 텔레비전을 보더라도, 교양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은 성긴 자리이고, 오락 프로그램을 보는 것은 촘촘한 자리이다. 지조와 신념에 충실한 정치가가 선 자리는 성긴 자리이고, 시류에 영합하여 철새처럼 자리를 옮겨 가는 정치가들이 선 자리는 촘촘한 자리이다. 때로 책을 보는 자리가 텔레비전을 보는 자리보다도 더 촘촘한 자리일 수가 있다. 같은 책을 읽거나 같은 음악을 한 자리에서 듣고 있는 두 사람이 선 자리도 그 성김과 촘촘함의 도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굳이 말하자면, 마치 지드의 좁은 문을 통해 닿아 있는 자리들을 성긴 자리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좁은 문은 또 다른 좁은 문으로 연결된다.

성긴 자리는 종종 춥고, 외롭다. 때로 자신과 다른 사람의 깊은 내면을 응시해야 하는 두려움도 함께 자리하며, 삶과 세상의 본질을 맞대면해야 하는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체의 내부에서 합성이 되지 않는 필수 아미노산 따위가 있듯이, 그렇게 성긴 자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자양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어려운 점은, 대부분의 성긴 자리는 선택 사항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를 피한다고 생존이 직접 위협받지 않으며, 사람들이 이를 두고 손가락질하는 일도 드물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촘촘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긴 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종종 그때문에 자신의 생존을 위협받기도 하며,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거나 까닭 모를 비난을 받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오로지 성긴 자리로부터만 삶의 향기는 배어 나온다.

우리가 가끔 음악을 통해, 그림을 통해, 혹은 시나 소설을 통해 만나는 축복된 순간들, 심장이 데일 듯한 열망이 정적으로부터 솟아 오르며 마음은 끝 간 데를 모르고 어디론가를 향해 비상하는 순간,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서 영사기를 정지시킨 듯 마냥 머무르고만 싶은 그런 순간들이 있다. 온갖 움직임과 어지러운 색상에 휩쓸려 지나가던 불식의 찰나가 순간 멈추어 선다. 어디선가 시리도록 투명한 광선이 저 멀고 깊은 곳을 향하여 끝없이 뻗어 나가고, 존재의 영역은 일상의 껍질을 부수며 무한과 영원을 향한 시선이 열린다. 아득한 곳에서 아련히 들리는 뜻 모를 음성에 죽은 듯 잠자던 가슴 속 깊은 곳의 현이 일어나 공명하고, 그 진동이 끝 간 데 없는 바닥으로부터 전신으로, 존재의 모든 감각 세포가 함께 일어나 출렁이는 전율로 파동친다. 이 순간, 파우스트라면 이렇게 외칠 것이다. '이제 되었다. 시간아, 멈추어라!'

우리가 음악의 공간에, 혹은 예술의 공간에 뿌리를 하나 내리고 있다면, 그 뿌리가 희구하는 자양분은 바로 이러한 순간과의 만남, 세기를 격한 위대한 영혼과의 교감이며, 그 교감으로 눈뜨는 새로운 세상, 잠자던 생명의 부활이 아닐까. 하루에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귓전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소리들, 눈앞을 배회하다 사라지는 수많은 모습들 가운데 진정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소리들, 가슴 속에 새기고 싶은 모습들이란 이렇게 우리가 진정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우리 내면의 진정한 생명을 반영하는 그런 것들이 아닐까.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일까? 고도는 무엇일까? 우리의 기다림과 바램, 그 깨어 있는 순간들을 어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어디서나 문 열고
단 하나의 말을
찾아나선 이여

눈 내리는 빈 숲의 겨울나무처럼
봄을 기다리며 깨어있는 이여

마음 붙일 언어의 집이 없어
때로는 엉뚱한 곳에
둥지를 트는 새여

즐거운 날에도
약간의 몸살기로
마음 앓는 이여

잠을 자면서도
다는 잠들지 않고
시의 팔을 베는

오늘도
고달픈 순례자여

   -- 시인은     -     이해인

공간이 성긴 만큼, 공기가 희박한 만큼 더욱 깨어 기다려야 한다. 아니, 기다린다고 하기보단 오히려 찾아 다녀야 한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리라. 깨어 있는 시인의 영혼이 발견한 세상을 표현할 단 하나의 언어를 찾아 나서는 길고 고통스러운 여정과, 감상자가 그 고통의 산물을 통해 원래의 시인의 영혼이 보았던 것을 되짚어 더듬는 과정이 온전히 같다 할 수 없으리만, 그 둘은 본질적으로 한가지를 향한 염원이며 둘 다 깨어 있음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모태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둘 다 자신만의 외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음악은 인류를 하나로 맺어 줄 수 있는 언어라고들 한다. 아마도 같은 곳을 바라보게끔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건 깊이 들어가는 것은 마치 높은 산정을 오르는 것과 같아서 점점 더 인가에서 멀어지고 인적을 찾기 힘든 외진 곳으로 사람을 이끈다. 점점 더 깊이 자신 속으로 침잠하게 되고, 거기서 새로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은 이 세상의 언어를 통해서는 나누기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모든 존재를 바쳐서 찾은 생명의 샘물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한적한 곳에서 솟아 오른다. 목이 터져라 불러도 그 하고 많은 목마른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리로 발길을 돌리려 하지 않는다. 그의 외침을 듣고서 그 샘물을 찾는 사람 또한 일상으로부터 떠나 홀로 그 길을 찾아 걸어야 한다. 그들은 외로워진다 - 음악으로 인해서.

오늘날처럼 온갖 하찮은 것들이 돈으로 포장되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며 저급한 감각을 무차별 공격하는 시대에는, 이 두 여정을 따로이 걷는 두 존재가 서로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자극도 더 이상 지나치다고 생각되지 않는 자극 중독의 이 시대는 우리 존재의 감옥이며 우리 생명의 족쇄이다. 시인은 혼탁한 세류에 휩쓸리고 독자는 번뜩이는 자극에 눈이 멀어 버린다. 눈부신 자극이 아니면 더 이상 독자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거리에 수 많은 모습들이 저마다 진실이라 우겨 외치며 온갖 천박한 현란함이 눈앞을 어지럽힐 때 시인은 자신의 외로운 골방을 누군가 찾아 들어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함께 자신의 시를 읽어 주기를 기다려야 하는 절망과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분명 거기에는 만남이 있다. 분명 무엇보다 눈부시고 고귀하게 빛나는 만남들이 있다. 오로지 내면으로만 조용히 차오르는 벅참과, 가슴을 채우고 마음을 밝히는 성결한 광휘를 몰고 다니는 만남들이 있다. 이 성기고 외로운 곳에서, 눈 내리는 빈 숲의 겨울나무처럼 외로운 존재들이 만나는 순간이 있다. 성기고 외로운 자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온기가 있고, 어두운 등촉 아래서만 그 태고의 비결을 드러내는 생명의 시집이 있다. 언어의 유희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곳, 세상의 온갖 사변이 그 단말마를 토하며 쓰러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그런 만남이 있다.

세상의 온갖 현혹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역시 그처럼 외로운 존재를 만난다. 풍란이 성긴 공기를 향해 그 뿌리를 뻗듯이, 그렇게 사람들이 말초적 자극을 쫓아 등을 돌리는 외로운 음악들을, 외로운 그림과 외로운 시를 향해, 자신을 향해 움츠러만 드는 우리 시대의 외로운 영혼들을 향해 우리의 가장 간절한 동경의 뿌리를 뻗는다. 그렇게, 함께 외로워져 가는 또 다른 영혼을 만난다. 또 다른 세상을 만난다. 진정 눈부시고, 존재와 감각, 영혼 모두가 함께 떨며 공명하는, 함께 빛나는 또 다른, 그러나 동시에 나와 너무 같은, 또 다른 존재를 만난다.

풍란이 그 뿌리를 뻗은 공간은 성긴 곳이다. 그래서 향기로운 곳이다. 우리네가 모든 간절함을 담아 뿌리를 뻗은 이 공간 또한 외롭고 추운 곳이다. 하지만, 그 뿌리에, 손길에 담긴 뜨거움은 만남을 기다린다. 그들이 어떤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손길에 이끌려 서로 만날 때, 그 때 퍼지는 온기와 공감은 우리가 진정 살아 있음을, 깨어 있음을 몸서리치는 행복감으로 느끼게 한다. 다시 한 번 나의 뿌리는 어디를 향해 뻗어 있는가를 돌아본다. 현대 문명의 오염으로 인해 점차 사라져만 가는 풍란이 다시 그 무성한 군락을 이루기를 바라듯이, 우리네 삶도, 성긴 허공으로 힘겨운 뿌리 내미는 우리네 삶도 그렇게 함께 어우러져 부대낄 수 있기를 바란다. 여전히 외로운 길이지만, 둘이서, 혹은 셋이서 따뜻한 어깨 맞대고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설령 아무도 함께 하지 않는 고독한 여정이 될 지언정 홀로 의연히 길을 떠나는 길손이었으면 한다. 하나의 만남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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