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음악 동호회의 한 게시판에서, 어떤 분께서 자신은 초보라고 말씀하시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읽었습니다. 아래의 글은 그 글에 대한 댓글이었습니다. 누구나가 다 겪는 초보시절 가운데, 제 자신의 초보시절을 떠올리며 그 때 생각난 것들을 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원래의 제목은 '제 수준은요'로 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고전음악을 들으려고 할 때, 여러가지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많은 생각들이 들기 마련입니다. 과연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부터 시작해서, 내가 지금 이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이 감정은 제대로 된 것인가, 그리고, 내가 듣는 이 음악은 너무 유명한 곡이기때문에 남들에게 이 곡을 듣는다고 하거나 혹은 좋아한다고 말하면 뭐라고 생각할까 하는 것까지 때로는 끝도 없는 생각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과연 굳이 힘을 들여서 어려운 음악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까,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보다 현실적인 어려움은, 들을 곡을 선정하고 음반을 구입할 때 마땅한 기준이나 정보가 없어서 망설이게 되는 부분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이 부분은 전혀 다루지 않았습니다.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가 이런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은 처음 들어서 좋은 음악은 하나도 없었다고, 악보를 보면서 연구하고, 연주해보고, 그러면서 제대로 이해를 하고 좋아하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서양 음악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평론가들이라도오늘날 명곡이라고 인정되는 작품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평을 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베에토벤의 5번 교향곡은 대표적인 경우이지요.
또 이런 이야기도 어떤 책에서 읽었습니다. 타임지의 음악 평론가 마이클 윌시는, 음악을 사랑하는데는 세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인내심과 지식, 그리고 상상력이 그것들인데, 제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인내심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냥 들어서 좋은 곡이라면 굳이 인내심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친해진 음악은 다른 말로 하면 지금의 자신의 음악적 소양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가정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대중 가요가 그렇지요. 그럴 경우에는 대부분 그로부터 얻는 것 또한 그리 크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지 않고 처음 들어서 좋은데도 그것이 명곡인 경우에는, 혹은 깊은 음악성이나 정신세계를 갖춘 곡으로 인정 받고 있는 경우에는, 비록 그 곡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그 곡의 진가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여도 크게 잘 못 된 생각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같은 경우는 운명 교향곡의 전곡을 약 천 번 가량 들었어도 여전히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데, 이는 제가 아직 부족하여 운명 교향곡이 내뿜는 음악의 샘물을 온전히 제것으로 하지 못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 자신도 음악을 처음 접하게 된 동기가 제가 들은 음악이 처음부터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제가 알지 못할 미지의 세계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음악은 저의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음악감상이란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취미라고 하기엔 음악이 제게 주는 의미나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기 때문이죠.
요즘 시대를 흔히 인스턴트 시대라고들 이야기합니다. 옛날에는 구경도 하지 못했던 것들을 너무나도 쉽게 구해 쓸 수 있는 세상이죠. 그리고 거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힘을 써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면, 그것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닌 이상 외면하려고들 하죠. 불행히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정신적인 자양분이란 것을 그와 같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분류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것을 얻기 위하여 어려운 책을 읽으려 하지 않으며, 이해되지 않는 음악을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조금만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 귀를 기울이는 대신 '웬 썰렁한 이야기?' 하는 반응들을 보입니다. 아이스크림이 혀에서 녹듯이 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면 달가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쉽게들 이야기하죠. 그건 나에게 맞지 않아, 혹은 내 개성이야,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기호문제가 아니냐고. 물론 그 말도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가 가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일 수 있습니다. 소질이 없는 경우도 있겠지요. 적어도 소질이 없다고 생각될 경우는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라디오 대담 프로에서 작곡가를 지망하는 한 학생이 이강숙 선생님에게 '선생님, 저는 작곡가가 되고 싶은데, 제게 작곡에 소질이 있는 지 없는 지를 어떻게 하면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이강숙 선생님이 '그것은 작곡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죽어라고 노력하면 겨우 보일까 말까 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제 친구 가운데 하나가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말도 있지요. '불가능이란 말은끝까지 가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행복한 말이다.' 마치 목욕탕에서 손가락 하나 탕 속에 집어넣어보고서는 '앗, 뜨거워, 나 못들어가' 하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참으로 오늘날의 상업자본들이 대중들의 기호에 아첨하여 만들어 낸 것들 이외에는 우리에게 맞는 것이란 하나도 없을 지도 모릅니다. 상업적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소비 향락적 문화 풍토에서 자신이 피폐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일이죠. 가장 자극적인 문화상품으로 대중을 유혹해서는 자기들의 의도에 맞게 길들이고, 그래서 마침내는 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오로지 자신들의 이윤을 극대화 하기만을 노리는 자들이 조성한 상업문화의 수렁에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기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 깨어있는 자라면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나는 자신의 삶 전부에 대해 책임을 지고싶다. 오로지 내 정신을 일깨우고, 삶의 드높은 열망과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는, 신의 거룩한 창조의 의지로부터 피어오른 성결한 향연으로만 내 가슴과 영혼을 채우리라. 나의 모든 삶 또한 그 향연의 시원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의 여행이 될지니, 아니면 내 영혼 거두어 가소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서 한 사람이 진정으로 깨어있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기에는 정신의 굴종과 죽음을 강요하는 상업문화의 공격이 너무도 집요하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좋은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윤이 되는 것을 마치 굶주린 승냥이처럼 쫓을 따름입니다. 대중음악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 음반업자나 프로모터들에 의해서 그들의 창작 의욕과 예술성을 상업적 목적에 맞추어 희생할 것을 강요받는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딛고 선 땅은 이렇게, 더 이상 피폐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량한 황무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고전음악이 있습니다.
그것이 서양의 고전음악이건 우리의 고전음악이건, 적어도 인간과 그 환경을 피폐시키는 상업문화에 대항해서 그들의 독소를 이겨내는 창이 되고 방패가 된다는 점에서만도 우리에게는 너무도 귀한 유산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상업문화에 길들여진 굴종된 정신에게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어 다시 살 수 있게하는 생명수가 될 수도 있거니와, 상업적 이윤을 위하여 인간성의 포기와 굴종을 강요하는 사악한 무리들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신성한 옥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참된 정신적 자양으로써 자신이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우리들이 원래 속해있어야 할 저높고 거룩한 세계를 바라보며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온갖 사악한 술수들이 먹혀들래야 먹혀들 수 없으며, 고전음악을 비롯한 모든 고귀한 예술들은 그러한 모든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기 때문입니다.
음악의 참된 의미와 가치는 음악학을 전공하거나 미학을 전공한 많은 분들이 훨씬 더 정확하고 풍요로운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피동적으로 동물적 생존을 이어나가기 보다는 자신의 신성한 생명의 계율을 따라 진정한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우리네는 음악이 다스리는 그 넓고 풍요로운 나라의 단지 이와같은 조그마한 보배만으로도 얼마든지 음악을 사랑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문학이나 미술도 경우가 다르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저는 고전음악이 어렵기 때문에 더욱 좋아한다는, 어쩌면 말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역설을 주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의지가 있고, 굴종을 거부하는 살아있는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기보다 더 큰 것을 이루려고 애쓰다가 쓰러져 죽는 자를 사랑한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아직은 덜 다듬어진 생각을 여기서 이만 마무리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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