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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helm Furtwaengler

바하에 관하여

by Amadeus 2008. 10. 15.

 

 

 

 

 

 


Johann Sebastian Bach
(1685. 3. 21. ~ 1750. 7. 28.)

 


Wilhelm Furtwängler
(1886. 1. 25 ~ 1954. 11. 30.)




바하에 대하여


 

먼 것을 듣는 감각

 

바하의 음악은 19세기 초기에 재발견된 이후 사람들의 평가에서 동요함이 가장 적었던 음악이다. 바하는 오늘날에도 예전이나 다름없이 어떤 작곡가도 희구할 수 없는 구름 위에 있는 악성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첫째로 바하의 음악은 조용함에 찬, 제작의 확실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자체가 완전한 조화를 가진 멜로디와 하머니와 리듬적 요소가 통일된 격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언제나 되풀이하여 경탄해 마지 않는 일이다. 아무리 조그만 바하의 작품에도 빈틈 없이 들어 간 그 정세한 균형, 모든 세부배치의 조용함, 그리고 벌써 처음부터 그것 자신 속에서도 정지하고 움직이지 않는 조용한 감각에 의해서 결합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바하의 생명감을 뚜렷하게 드러나게 성격지우는 것이고, 바하의 음악에 진실한 의미의 초개인적인 색채를 주는 것이다.

음악사가는 흔히 우리를 이렇게 설득하려고 한다. 즉, 바하와 같은 거인도 그의 시대에다 올려놓고 보면 그리 위대할 것이 없다. 그 시대와 비교하고 그의 시대에서 바라보면 우리에게 그이 후광으로 보여지는 초인적인 위대함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바하도 여러 인간중의 한 인간이며, 비록 위대함에는 틀림이 없다 할 지라도 그의 시대를 구성하고 있었던 많은 작곡가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정반대였다고 생각된다. 즉 그의 동시대의 다른 작곡가, 가령 비발디-바하는 그로부터 많은 소재를 받아들였지만-같은 사람과 비교하면 바하 음악의 놀라운 우월성이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바하의 손으로 된 것으로 추측되는 작품의 좋은 점은 다른 사람의 작곡과 비교할수록 그 큰 차이가 두드러진다. 저 위대한 핸델의 빛나는 작품마저도 조용하고 부동함이 없이 방황을 모르는 바하의 작곡적 사색의 높은 격조 옆에 놓고 보면 우스우리만큼 자의적으로 생각되고 너무나 변덕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바하에는 찰나에의 집중이 있고 그러면서도 알지 못하는 넓고 먼 세계에 이어지는 집중이 있다. 실로 전체의 높은 전망을 가지면서도 찰나찰나의 단적인 충일이 있다. 가까움과 멂에 대해서 동시에 생생하게 눈뜬 감정을 가지고 있다. 분방한 충일감을 가진 바하의 음악 구성에 대해서, 전체의 커다란 흐름에 대해서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는 마음, 가까움을 체험함과 동시에 먼 곳을 듣는 감각을 섞어 짠 바하의 음악은 그 말고는 음악세계에서 달리 예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는 뚜렸하게 의식하지 않지만, 틀림없이 이것이야말로 바하의 음악의 특수한 위치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면에서는 분명히 약동적이고, 선적이고 조형적이고, 침투적인 감동을 준다. 그러면서도 다른 면으로는 그 자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그 자신에게 한발짝도 벗어나지도 않는다. 그것은 감성적인 자극을 주기를 조심하며 사람에게 너무 단적으로 말을 걸지 않는다. 거기에는 힘참과 부드러움, 긴박과 이완, 솟아오르는 생명과 심원한 조용함이 모방할 수 없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다.

 

생명감 넘치는 기계장치

 

바하의 시대에는 미사여구로써, 혹은 조각무늬로써 나타나는 일종의 상투적 예술이 후대에서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한다. 물론 이 점에서 바하도 그 시대정신에서 자유로왔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바하는 시대가 소재로서 그에게 물려준 것을 그렇게도 독자적인 성격으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일까! 후대의 고전작곡가들이 복수 주제로 작곡한 것과 달리 그는 단일 주제로 시종하였 다. 그가 시대의 풍조와 함께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그는 어떠한 방법으로 그것을 수행하고 감명있는 것으로 심화했던 것일까. 뒷날의 고전적 작곡가에게는 한계로서 나타난 것이 그의 경우는 심오한, 가장 결정적인 예술적 의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바하음악에 어떤 종류의 한계를 주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하의 음악에 그 운명을 지어준 것이다. 특히 그의 뒤에 배출된 작곡가들에 비교해서 그렇다. 바하는 왕성한 전진을 추구하는 주제의 콘트라스트 주제의 균위법을 쓰기를 피했다. 주제의 특수한 형체를 어느 일정한 선을 넘어서 전개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 가령 베토벤은 철두철미 드라머 작가로서 창작하였다. 하나하나 주제의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며 연기를 시켰다. 바하는 그 자신 속에 틀어 박혀 있었다고 해도 좋으리라. 서정적이고 또 서사적이며 객관적이고 동시에 주관적이다. 이 두 사람에게, 바하에게도 또 베토벤에게도 공통된 점은 전체를 하나의 진실로서 창조자에게는 관계없이 작품 자신의 내부에서 완성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바하를 저절로 베토벤과 비교하지 않을 수없다. 베토벤의 음악은 바하와 나란히 서서 역사적으로 대등한 지위를 갖게 된다. 그 밖의 점에서는 이 두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하옇든 베토벤도 작품이 작품 자신의 힘에 의해서 살아가게 될 때까지, 자신의 길을 끝까지 다 갈 수 있게 되도록까지 창작의 손길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모든 작품이 자신의 운명을 방해받지 않고 뻗어나가게 되도록 지칠줄 모르는 감시의 눈을 번득였다.

바하의 모든 작품은 아무래도 벗어날 수 없는 철저하게 규정된 궤도 위를 매진하고 추구한다. 이 점에서 그는 어느 기계를, 시계장치를 닮았다. 물론 자연이란 손으로 만들어진 생명있는 기계장치같기는 하지만, 그의 모든 음악작품에서 일단 내디딘 법칙은 그 막다른 끝까지 따라서 가게 된다. 또는 작품이 규정된 자기의 길을 스스로 간다. 이들 코랄을, 이들 푸가를 건축한 사람, 이를 전개시키고 완성시킨 사람은 실로 이 세상 사람같지가 않게 느껴진다. 일체의 것을 주재하는 세계정신, 세계를 건축하는 거장처럼 생각된다.이에 비하면 바하와 같은 시대의 위대한 동료 핸델마저도 어쩌면 그리 주관적, 발작적이요, 찰나의 직관에만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그 밖의 점에서는 가령 웅장하게 치솟아 오르는 구상에 있어서는 완전히 바하와 동격이다. 핸델은 바로크가 낳은 거인이고 초인이다. 화산처럼 폭발적이고 찬란한 광휘에 차고 분방하다. 그런 핸델마저도 바하 옆에 놓고 보면 주관적, 발작적이고 직관적인 것이다.

그러한 것은 바하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바하는 이미 그런 데에 살고 있지 않다. 그렇다기보다, 바하에게는 그런 것이 하나도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체의 주관적인 과잉된 충일은 그의 경우 말하자면 객관적 음악사상 속에 녹아버렸다. 여기서는 그저 지칠 줄도 모르고, 가차없이 작용하는 조형적인 무서운 힘이 그 위력을 떨칠 뿐이다.

 

가장 위대한 주관주의자

 

바하는 위대한 객관주의자일 뿐만이 아니다. 모든 개성적인 생명을 형식으로 바꿔놓는 데에 다른 어떤 작곡가보다 앞서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바로 그러한 까닭에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자기의 모든 작품에서 모든 표현과 모든 음악적 굴절을 충일하게 하며 그것을 탐미하는 사람이었다. 바하의 푸가는 형식으로서 최고의 형체를 갖는 법칙적인 음악적 경과의 원형이다. 그러나 그는그저 강력한 형식으로서 압축된 푸가의 창조자일뿐 아니라, 동시에 공상적인 무변분방한 프렐류드의 작곡자이기도 하다. 가령 평균율 피아노곡집이나 무수한 오르간 작품들 속에 전개되고 있는 저 프렐류드와 푸가의 융합은 오직 그에게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세계를 나타낸다. 이 둘이 잘 통합됨으로써, 비로소 바하의 감각의 전체량을 포괄하기에 알맞은 것이 형성된다.

그의 칸타타에서, 그의 수난곡에서, 그의 콘체르토의 아다지오에서, 또 그의 무수한 작품 속에서 바하는 지상의 음악으로서 발상할 수 있는 인간 중에서 가장 위대한 주관주의자임을 보여준다. 바하는 신의 아들 예수의 고난을, 구세주의 희유의 역사를 그토록 깊게 그 자신의 혼에 사무쳐 체험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저 마지막 작품 수난곡에서 그토록 위대한 작품을 완성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수난곡은 그 첫소리에서 마지막 소리까지 꿰뚫고 흐르는 정상이 암시적이면서도 웅장한 통체를 이루고 있다. 그 점에서 오로지 낭만시대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게나 비교할 수 있으리라. 바그너의 경우 바하 자신의 경우에서도 그렇지만 작품의 감정이 이토록 강하게 전 작품위에 깊은 음영을 던지고 있는 것은 달리 구경할 수가 없다. 작곡자의 안간과 그 혼에 이토록 깊이 의존한 작품은 달리 찾아 볼 수 없다.

 

가차없는 객관성의 지배

 

어쨌든 이 두 작품이 전제하고 있는 것이나, 작곡자는 아무리 서로 다르기느 할 망정 객관성의 배후에서 주관성이 그 궤도를 무너뜨리고 있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것은 이 작품에서만 그런것이 아니다. 자세히 조사해 보면 많건 적건, 바하의 모든 작품에서 그런 것이다. 모든 선율적인, 화성적인 곡절이나 모든 소절에 이르기까지 그저 가차없는 객관성만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만큼 웅대한 최고의 인간적 개성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들 중의 하나는 다른 것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대립이야말로 그 자신 속에 바하라는 현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흔히 베토벤은 엉뚱하리만치 주관적으로 보여지고, 바하는 그 정반대로 극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바하가 베토벤보다 더 객관적일 까닭도 없고, 베토벤이 바하보다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런 방법에 임하는 그들의 수법과 양식이 서로 다를 뿐이다. 아닌게 아니라 베토벤은 개성적인 인간으로서 발상하리라. 그러나 그는 이 발상과 주제를 객관적으로 추궁한다. 가차없는 정확성과 엄격성을 가지고 각각 그 고유의 운명을 지향하게 하면서. 베토벤의 경우 일단 그 주제가 제시되고 나면 그 자신은 말하자면 자기 작품의 경과에 대해서 아무 권리도 갖지 못하며 또 가지려 고도 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낭만파를 구제한 해방자

 

바하에게는 음악적인 노력은 실로 정미, 그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제는 독립된 생명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따로 떼어서 전개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작품과 작곡자 사이의 탯줄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음악은 그 창조자에게 바싹 붙어있다. 그러므로 그의 경우는 베토벤이 음악의 생명으로 삼고 있는 주제와 주제의 대립, 창조족인 대위라는 데까지 이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는 모든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창조의 의지와, 거대한 주관성이라는 양극을 지니고 있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이것이야말로 낭만파가 바하에 공감하고 바하에 매료된 원인이다. 멘델스존은 그의 일생을 통해서 그 자신의 작곡이나 그 자신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속에서 바하의 감동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멘델스존에 의한 바하 재발견 이후 낭만파는 바하의 음악에서 이상적 전형을 발견했다. 극단적으로 개인적인 이유에서였지만, 낭만파는 바하에게서 자기들을 구제해주는 해방자를 보았다. 너무나 자극 과잉이라는 자기들의 병적인 경향에서 구제해주는 자를 발견한 것이다.

 

유럽 하늘을 밝히는 빛

 

바하는 낭만파 사람들과 아무리 다르다고 하지만 만일 그가 같은 살을 살로 가지며 같은 피를 피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만일 그가 마음 속에 서로 통하는 것을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커다란 영향을 그들 낭만파에 줄 수가 없었으리라. 어느 입장에서 보면 바하는 낭만파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낭만파였다. 바하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낭만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후 시대가 자남에 따라서 그 모습은 확대강화는 했으나 달라진 것은 없다. 단 한가지 빠뜨릴 수가 없는 일이 있다. 바하는 종교음악가로서 가장 위대했으며 오늘날도 그렇다는 사실이다. 바하의 음악과 그의 마음 안에 있었던 종교적인 핵심의 결합은 너무나 밀접하고 강열하다. 이것은 그의 주제의 전개, 그밖의 음악형성에서 한계를 이루고 있다. 그뿐 아니라 지상적인 풍부한 현실을 음악 속에 담아 넣는 방해도 되고 있다. 가령 그와 동시대의 동료였던 핸델이나, 그보다 뒤의 작곡가에 비해서.

내심에서 지고자와 밀접한 결합을 갖는 것은 만일 다른 인간이었다면 도리어 정력의 고달픔, 맥빠짐, 경솔한 자기 소모같은 것에 빠져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하의 경우는 그것이 도리어 신선하고 높여진 끊임없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바하를 어느 누구도 능가못하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 음악에서의 호메로스로 보게 하는 이유이다. 그의 빛은 지금 우리 유럽의 음악의 하늘에 빛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우리는 아무도 그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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