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파에 대하여
'낭만파'적이었던 19세기의 예술가들
완성된 예술 작품이 위대하다는 것은 그것이 우선 느껴진 것, 사색하고 직관하고 의욕된 것에 형체를 주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조형하는 힘이란 것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낭만파"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낭만파"라면 우리는 우선 단순한 기분에 몸을 내맡기는 것, 현실의 세계로부터 착각이나 몽환의 세계로 달아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착각이나 몽환이란 형체로 될 수도 없고 또 흔히 되어도 안되는 것이다.
19세기의 많은 예술가들은 "낭만파"적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그 이전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같은 형체를 만드는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한계에 대해서 괴테가 주장한 말은 옳았다. 그는 낭만적인 것 속에는 뭔가 "일부러 짜넣어진 것, 동경하며 구한 것, 과장된 것"이 있다고 했다. 바꿔 말하자면 뭔가 병적인 것, 미성숙한 것, 세상의 상식에 견디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뛰어난 작품은 그 자체 고전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지나치게 부풀어진 것, 형식을 저버리고 범람하는 감정이란 것은 물론 우리 시대의 정신과 최대의 대립을 하고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시대의 정신은 지난 어떤 시대보다도 의식적으로 현실과 대결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과제를 노리기 때문이다. 감정만 모든 것이고, 형식이며 절도며 의지같은 것이 의미가 없는 세계 따위는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다고 오늘날의 사람들은 말한다.
한 없이 솟는 생명의 상징
그래서 오늘날에도 낭만파라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낭만파적으로 표현하고 묘사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철늦은 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혹은 그것을 사회적인 질서가 있는 세계에서 본다면 더욱 나쁜 일이 - 즉 웃기는 일이 - 되지 말란 법도 없다. 특히 음악의 세계에서는 이것을 거듭 되풀이해서 체험하게 된다. 단 한 사람 피츠너(Pfitzner)라는 예외만은 빼 놓고 말이다. 그에게만은 사람들이 그의 낭만파에의 고백을 도리어 그의 아름다움의 특징으로 허용하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그의 성격에 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밖에는 오늘날은 일체의 "낭만파"적인 현상이 전보다도 더욱 엄격하게 거부되고 있다.
그러나 한 편 잘 보면 음악회의 회장을 채워 온 것은 시대의 구분이 아니다. "새로운" 이라든가 "낡은" 작곡으로 차별되지 않는다. "고전적"이기 때문에 혹은 "낭만적"이거나 "현대적"이기 때문에 그 연주에 사람들이 더 밀려 들거나 텅 비거나 하지 않는다. 청중이 오고 안오고는 차라리 "전인적"이냐 아니냐에서 나오는 일이다. 그가 어느 파에 속하든 어느 시대의 작품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전인간"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늘날 매우 문제삼고 있는 "현실의 극복"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또 환상도 꿈도 예감도 있어야 한다. 혹은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거기에는 낭만파의 밑바탕이 되는 저 예감의 충일, 비현실적인 것, 초현실적인 것, 한 없이 약동하는 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다시 이들에 형체와 현실을 주는 힘이 있어야 한다.
진실한 예술작품이라면그것은 낭만주의 일변도로 끝날 수가 없다. 위대한 예술가의 조형력은 그저 "낭만주의"로만 채워질 수 없다. 그러나 또 위대한 예술작품이라면 "낭만주의"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무릇 예술이란 것은 한없이 솟아 오르는 생명의 상징으로서만이 - 니체가 얼마나 잘 표현한 말인가 - 비로소 그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거부해야 할 낭만주의라는 것이 있다. 나 자신도 엄격하게 거부하고 있는 낭만주의라는 것은 현실을 밀어내고 대신 환상과 꿈의 세계로 바꿔 놓으려는 정신 태도이다. 현재의 요구와 가혹함에 견디지 못하고 무책임하고 덧없는 공상 속으로 달아나려는 태도이다 - 그것은 눈 앞의 현실과 대결할 수 없는 무능을 말한다.
명예로운 칭호, "낭만파"
그런데 현실을(그것은 항상 전인간적 현실이어야 한다) 도피하려는 이런 경향은 실상 이른바 낭만파라고 내걸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매우 적게밖에 구경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적수이며 낭만파라는 이름만 붙으면 무엇이고 원수로 알고 끄집어내리는데 지칠 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것은 즉 이 기술화된 시대에서 일어나는 일의 한 조각이다. "기동적인 것"이 생명의 전체로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낭만파라고 불러주어야 한다. 그들은 무릇 애정, 인간적 따뜻함, 충일, 관능, 한없는 약동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를 떼어내고 자기를 가두어버리고 그것들을 원수처럼 무서워한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오늘날 진짜의 의미에서 낭만파라고 하겠다. 즉 전 인간적 현실에서 도피하는 사람들, 우리 경우에는 비창조적인 지성적 환상의 세계 속으로 도망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낭만파인 것이다.
"낭만주의 없는 세계" - 라는 것은 오늘날의 젊은 사람들이 들고 나오는 표어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일면적이다. 오늘날에는 이미 바닥에서부터 뽑혀나가 있는 19세기의 낭만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이것도 같은 정도로 환상이고 도피이다. 아니 이편이 도리어 19세기의 것보다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 현실주의라고 부르고 그렇게 팔고 다니며 그런 태도로 폼을 낸다. 그러면서 자기 속에 비창조적인 것의 핵심을 안고 있다. 그래서 이런 세계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낭만파라고 지칭되는 것은 명예로운 칭호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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