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penwolf
슈베르트의 음악과 sonority
Amadeus
2008. 10. 22. 09:23
1. 슈베르트와 음색
얼마 전에...그러니까 몇 달 전,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 미완성을 들으며, 정확히는 2악장 어딘가를 들으며 갑자기 주위가 아득해지는 느낌이 한 번 들었습니다.
그토록 많이 들었던 음악이고, 심지어는 대학 다닐 때 지휘법 수업의 실기시험곡이기도 한 곡이라, 스코어 또한 그리 낯설지 않은 곡이지만, 제가 지나온, 제 발길이 닿은 모든 곳에는 아직도 많은 아름다운 꽃들이 채 싹을 틔우지 않은 채 땅 속에 숨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하간, 그 느낌이 드는 순간 저는 다른 모든 생각을 접고, 그 느낌에 대해, 그 느낌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무었일까? "나의 음악은 나의 슬픔으로부터 빚어졌다"라고 할 때의 그 슈베르트 음악 특유의 슬픔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늑함과 푸근함, 정겨움, 애틋함 이런 단어들로 특징지울수 있는 인간의 향기, 오랜 시간 서로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익어온 정겨움 같은 것이었습니다. 혹은 그런 것을 함께 나누는 오랜 친구의 체취와 호흡, 그의 음성이 들릴 때의 그 편안함, 더욱 다가서고 싶은 그리움 - 이래서 저는 오래 전에 보았던, 이 곡에 대한 유명한 표현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알레그로의 악장이 시작되고 서주가 지나간 뒤, 바이올린의 조용한 속삭임 위로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달콤한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하자, 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저마다 '슈베르트이다!' 하고 소곤거렸다. 이 단조로 쓴, 구슬픈 노래와 첼로의 주제, 그리고 랜틀러 무곡같은 유연한 가락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선율이 계속될 때 듣고 있던 사람들의 가슴은, 마치 그리운 슈베르트가 먼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 사이에 살아 서 있는 듯한 기쁨에 사로잡혔다."
---- Eduard Hanslick
"그리운 슈베르트" - 우리는 우리가 아는 위대한 작곡가들에게 이러한 수식어를 붙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운"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작곡가는 슈베르트 말고는 달리 없을 듯 합니다. 그리운 베에토벤, 그리운 모짜르트, 그리운 바흐 - 이 모든 표현은 어딘가 낯설고 또 어쩌면 본질을 비켜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들에게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다른 수식어들이 있습니다. 위대한, 고결한 등등의 수식어들이 이들에게는 보다 더 어울릴 것입니다.
하지만 슈베르트에겐 "그리운"이라는 수식어 말고는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수식어를 찾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슈베르트와 그의 음악의 본질을 비추어 주는 면조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그리운 대상이 눈 앞에 보이고, 귀에 들릴 때의 기쁨, 뛰어 오르며 환호하는 기쁨이 아니라, 가슴의 기복을 따라 잔잔히 온 몸으로 배어드는 기쁨, 두근거림과 편안함이 손을 잡고 걷는 그러한 기쁨입니다.
그 날 이러한 슈베르트를 제 가슴으로 날라온 것은, 평소에 그렇게 익숙하던 선율도 아니고, 장엄한 교향악적 구성력도 아닌, 몇개의 목관악기와 현악기들이 여리게 연주하는 부분에서 묻어나온 색채였습니다. 여러 가지 색들이 섞여 만들어내는 경묘하고 아릿한 파스텔 톤의 색채, 거기엔 '그리운 슈베르트'라고 부를만한 바로 그런 인간의 향기가 묻어 나왔습니다.
관현악의 음색이라 하면, 그리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섯 종류의 현악기, 너댓가지 종류의 목관악기, 그와 비슷한 종류의 금관악기, 타악기, 그외 또 몇가지...그나마 슈베르트의 교향곡은 그 모두를 사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그리 규모가 크지도, 다채롭지도 않은 일반적인 2관 편성의 오케스트라를 통해서 들려온 소리는 오히려 그보다 훨씬 미묘하고 다채로운 색채였습니다.
이러한 색채는 단지 이러한 악기들의 다양한 음색의 조합만으로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선율과 화성, 강약의 모든 요소들과 조합된 악기들의 음색과 음향의 조화, 계산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본능과 감각으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그만의 '색깔' - 바로 이것이 그 아득한 느낌과 그를 따라 나온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2. 색채 혹은 Sonority
음악은 결국 어떤 소리들이 우리 귀에어떤 순서로 들어오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주 오랫동안, 이 "어떤"이라는 부분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주로 논리적인 요소들만을 생각해왔습니다. 혹은 질서나 구성에 관한 추상적 구조와 진행들이라고나 할까요. 혹은 악보에 나타난 기호로서 직접 표현 가능한 것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여하간, 그게 무엇이 되었건, 보다 감각적인 부분은 거기서 "소외"되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러한 추상적 구조를 전달해 주는 소리 자체 또한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이제는 명확히 느낍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해왔던 소리는 주로 소위 "아름다운" 소리들이었음도 명확히 느낍니다.
그러한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 것은 언젠가 어떤 현대음악에 대한 글에서 나타났던 'Sonority'라는 단어와, 어떤 레코드 리뷰에선가 혹은 음악 해설서였던가에서 보았던, 브람스 교향곡 4번의 소리를 어떤 지휘자가 얼마나 훌륭하게 만들어내었던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 특히 현대음악을 들을 때 - 음악을 들으며 가급적 순수한 감각 현상으로서의 "음향"이라는 부분에 대해 많은 주의를 기울이며 음악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미몽을 헤매는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은 기대했던 현대음악이나 브람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슈베르트를 통해서 자신의 옷자락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 옷자락 끝을 따라서 요즘은 브람스를 만납니다. 여섯장 짜리 시디 체인저에 브람스 4번이 두장, 1번과 3번이 각 한 장씩, 그리고 슈베르트와 모짜르트. 게다가 집엔 브람스 2번이 오디오에 들어 있습니다.
아침 출근길엔 그 중의 브람스 4번을 들으며 각 작곡가를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모두에 대해 적당한 비유가 떠오른 것도 아니고, 또 그 답이 적합한 것은 더욱 아닐 지 모르겠지만, 일단 브람스는 꼬냑을, 그것도 향이 아주 풍부한 꼬냑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풍부한 향과 Flavour, 거기다가 40도라는 도수에 적갈색까지, 브람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술은 꼬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난 역시 타고난 술꾼이갑다 하는 생각에 혼자 빙그레 웃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작곡가들을 함께 떠올려보니, 그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우선 바흐만 하더라도 적합한 술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베에토벤은 위스키가 어울리고, '그리운' 슈베르트는 약간의 단맛과 드라이보단 좀 더 향이 있는 화이트와인이 어울리지 않을까, 슈만은 레드와인, 이런 저런 즐겁고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새 사무실이 되었습니다.
2002. 0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