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penwolf

차와 음악

Amadeus 2008. 10. 21. 15:21
좀 특이하게 차를 즐기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기서 차라 함은 전통차를 이르는데, 전통차는 녹차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전통차라고 하면 쌍화차, 인삼차, 생강차 등등을 일컫는 말로 알아들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들은 대용차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녹차를 구하는 것이 어렵거나 혹은 차를 우려 마시는 것이 번거로운 상황에서 기용되는 대타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이 사람은 (녹)차와 더불어 사는 정도라서, 손님들이 찾아 오면 당연히 차를 먼저 대접하게 된다. 물론 찾아 오는 사람들도 거기서 거기라, 차를 즐기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 양반이 대접하는 모양이, 머 거의 이빨 나간 찻잔에다가 티백을 사용한다고 한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차는 따는 시기에 따라 등급이 달라진다. 우선 가장 흔한 분류로 세작, 중작, 대작이 있는데, 세작이란 곡우가 지나고 일주일 이내에 채취한 차잎으로 덖은 차를 말한다. 크기가 작고 구하기가 어려움이 마치 참새 혓바닥과 같다고 하여 작설차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약 보름 가량의 간격을 두고 따는 잎으로 만든 차들이 각각 중작, 대작이 된다. 뒤로 갈 수록 잎의 푸른 빛이 더해지고 크기가 커진다. 그에 따라 엽록소와 탄닌이 많아지게 된다.

대작을 만들고(사실은 거의 만들지 않는다 : 상품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서 남은 잎들은 티백 차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따라서 티백 차는 최 하등품이며, 최 상등품으로는 세작 전, 즉 곡우가 오기 전에 잎을 따서 만드는 우전차를 친다. 그 가운데 극상의 잎들만 선별하고 말려 가루를 만들면 이것이 곧 말차, 혹은 가루차라고 하는 것으로 기억한다(언제나 그렇듯이, 내 기억은 신뢰할만한 무엇이 아니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샜는데, 하여간 티백 녹차를 대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역시 그런 사람이 티백 녹차를 낸다는 것은 거의 사람보고 여물 먹으라는 소리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우선, 이 사람이 낸 티백의 녹차는 우리가 통상 마시는 티백의 녹차와 그 격이 다르다. 물맛도 있겠으나, 차는 무엇보다도 물의 온도와우리는 시간에 따라 같은 재료라도 천양지차의 맛을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양반의 티백 녹차는 보통 사람의 세작보다 더 맛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티백을 대접하는 것은 자신의 다예에 대한 과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차를 즐기는 사람은 어떤 차로부터도 차의 본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전이 되었건 티백이 되었건달라지는 것은 녹차의 본질적인 맛을 둘러싼 잡다한 곁다리일 뿐이고, 진정즐기는 사람에게는 본질이 변함 없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나는 물론 그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무릇 차에서는 그 다변한 맛과 향기 그 자체가 때로 본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 또한 티백의 차를 충분히 맛깔나게 즐긴다. 그렇다고 손님에게 티백의 차를 권하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스스로 즐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어떤 차를 통해서도 차의 본 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찌 좋은 차를 낸다고 해서 좋은 차의 그 모든 기품을 맛볼 수 있겠는가. 평소 차를 즐기며 미각을 단련하고 이런 저런 맛을 느끼며 그 차이를 분별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좋은 차가 정말 좋은 것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뛰어난 연주자가 거창하게 행하는 연주회는 내게 좋은 차를 함께 하는 시간과 같다. 여유가 필요하고, 들리는 소리의 모든 미세한 변화를 놓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좋은 차로부터 나오는 그 깊은 맛과 향기를 오롯이 담아 내려는 마음과 거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일년을 통틀어 그렇게 여유를 가지면서 차를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이란 정말 몇 되지 않는다. 설령 집에서 차를 내어 마신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적당한 선에서 우려 마시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혹, 그렇게 대충 우린 차에 우연히 여러가지 배합이 절묘하게 맞아서 최상의 맛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 때 느끼는 행복감을 어떻게 표현할까.

연주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간혹 연주회장을 찾으면 귀국 연주회니 어쩌니 하면서 팜플렛 거치대에 널린 팜플렛들을 한아름 들고 들어온다. 그리곤 그 가운데 선별하여 달력에 날짜를 기록해 놓았다가 형편이 되는 날이면 혼자 쭐레쭐레 연주회장을 찾는다. 이런 연주회는 정말 마음 편하게 간다. 비싼 연주회는 일단 본전!을 뽑아야 하기 때문에 이것 저것 따지는 것도 많을 뿐 더러 기대감 또한 높기 마련이다. 그래서 실망도 큰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이런 '작은' 연주회는 그리 큰 기대를 안고서 찾는 무엇이 아니다. 좋은 차의 깊은 맛을 느끼려고 찾는 연주회가 아니라, 다만 차의 본 맛을 느낄 수 있다면 그로써 족한 것이다. 행여 운이 좋게도 연주자의 컨디션이 좋고 게다가 어느 정도 기본이 갖춰진 연주자라면, 웬만큼 거창한 연주회에서 조차도 찾기 힘든 그런 감동을 덤으로 받을 수 있다. 더군다나 자그마한 실수나 결함 따위는 그러려니 하고 듣기 때문에, 오히려 음악 자체에 훨씬 더 잘 몰입할 수 있고 지엽적인 부분을 넘어 곡의 본질에 접근하기가 쉽다. 차의 본 맛을 느끼기가 쉽다. "이것이 '좋은' 차다" 하면서 내 놓는 차에서 그게 왜 좋은 지를 신경쓰기 보다는, "이것이 차라는 것이다" 하면서 내어 놓는 차를 통해서 도대체 차가 무엇인지, 어떤 맛인 지를 알기가 훨씬 더 쉬울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이치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좋은 차가 좋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기대를 한 아름 안고 찾았다가 연주자들의 무성의함, 서툰 기량, 음악에 대한 몰이해에 치를 떨고 나온 경우가 한 번 있었다. 내가 끔찍히도 좋아하는 베에토벤의 현악 사중주 15번 연주였다. 내게 최초로 음악이 도대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 지를, 음악을 통해 궁극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 지를 가르쳐준, 혹은 길을 열어준 곡이니만큼 그런 곡을 처음 실연으로 듣는 데 대한 기대란 정말 말할 수 없었다. 그만큼 실망 또한 커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음악이 끝나고 자리를 일어설 때 음악을 함께 듣던 후배가 말했다. "형님, 명곡이란 연주에 관계 없이 감동을 주는 것이군요." 참으로 그랬다. 그 실망과 탄식의 와중에 억제할 수 없는 전율이 온몸을 타고 지나치는 것을 수도 없이 느꼈다. 음악은, 적어도 음악만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훌륭한 연주자의 아름다운 소리, 정교한 앙상블, 화려한 기교 - 이 모든 것들은 음악을 듣는 기쁨을 한 층 배가시킨다. 어떤 때는 이들로 인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음악 자체에 대한 이해와 감동 없이 어떻게 그러한 기쁨이 나올 수 있을까. 음악 자체가 주는 감동에 어찌 이를 비교할 수 있을까. '명곡이 연주에 관계없이 주는 감동', 이것은 티백에 담기든 혹은 우전을 통해 나오든 관계없이 느낄 수 있는 차의 본맛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전제될 때에야 비로소 나머지 것들이 제 자리를 찾아서 마치 핵 융합을 하듯이 감동의 폭죽들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훌륭한 연주, 좋은 오디오에서 나오는 광채나는 소리, 희귀한 음반 - 이 모두 음악을 듣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매력적인 말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들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담아내는 음악이다. 그저 그런 곡의 훌륭한 연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감동보다는 훌륭한 곡의 적당한 수준의 연주가 주는 감동이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음악 자체가 주는 감동은 나무의 몸통과도 같다. 잎이 없어도 겨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렇게 굳건히 서 있다. 때가 되면 무성한 잎으로 그 훌륭한 자태를 마음껏 드러낸다. 그러나, 잎이 아무리 모인다고 해도 잎새만 가지고는 나무가 되지 못한다.

스산한 겨울 어귀, 가슴 속에 쌓인 낙옆들은 계절의 바람이 어디론가 서글픈 곳으로 쓸어간다. 그 자리에 과연 뿌리내린 나무가 있는가? 텅 빈 마당에 철따라 낙옆만 쌓였다간 이내 비어버리는 황량한 정원은 아닌가? 아니면 앙상한 가지만 남았어도 철마다 새 잎이 돋고, 비와 바람에 등걸이 굵어져 언젠가는 거대한 아름드리로 자라날 그런 나목이라도 한 그루 남아 있는가? 조락의 계절, 마음조차 낙옆과 함께 시들어 떨어질 삶이 아니라면, 오늘 한 줌 낙옆을 쫓기보다는 아직도 푸르른 가슴에 한 뼘어치 안되는 나무라도 심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