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작품

Henryk Gorecki : 교향곡 제 3번

Amadeus 2008. 10. 15. 12:40

 

 

헨릭 구레츠키
Henryk Gorecki

Symphony No. 3, Op. 36

  • Dawn Upshaw, soprano
  • London Synfonietta
  • David Zinman, cond.
  • Elektra Nonesuch



구레츠키의 교향곡 3번이 연주되기 전

1939년 9월의 첫째날 먼동이 틀 무렵, 겉으로는 훈련중에 있었던 한 조금 낡은 전투 순양함이 자유 도시 Danzig(Gdansk)밖의 정박지로부터 움직여 나와 폴란드 영토로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용감하였으나 준비가 부족했던 국가에 대한 히틀러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즈음이 되어서는 금세기 들어 두번째로 유럽이 전란에 휩싸였다.

그러한 사건들을 기념하는 50주년 기념식에서, 실러와 베에토벤이 상상했던, 적어도 수"백만인"(주 1)의 사람들이 한 순간이나마 바르샤뱌의 오페라 하우스로부터 중계된 TV 프로그램으로 하나가 되었다. 베에토벤과 말러, 쇤베르크, 그리고 펜데레츠키의 음악들(주2)이 동시에 기념적하고, 긍정하며 또한 항의하는 일련의 과정을 만들어 내었으나, 시청자들에게는 단지 그 공동체적인 작용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회상과 자세한 보충 설명들에 의해서만 연결되었다.

그렇게 개인적인 어떤 것이 거의 가장 우주적인 현대 매체에 의해서만 손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은 옳다고 생각이 되었다. 거기에 모인 국가 수반들과 수행원들의 개인적인 생각들이야 어떻던지 간에, 연주회 자체는 필연적이고 본질적으로 공식적인 행사였다. 그러나, 그 정확히 반대되는 이유로 인해 그보다 결코 중요성이 떨어지지 않은 연주회가 같은 날 저녁 독일의 Brunswick 시에서 열렸다.

Brunswick시의 옛 광장 중심에서 - 마치 바르샤바가 전쟁 초기에 폐허화 되었듯 전쟁 말기에 폐허가 된 - 13세기의 성 Magnus 성당이 재건축되어 서있다. TV 카메라들이나 안전 경찰들이 주목하지도 않았고, 지역 언론매체들조차 알아채지 못했으나, 9월 저녁날의 교회를 가득 채운 그 지역의 청중들은 나름대로 바르샤뱌에서의 국제적인 연주회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마치 Lessing에게 의식적으로 경의를 표하기라도 하듯이 - 레싱은 그의 극시 Nathan the Wise(현자 나탄)을 근처의 Wolfenbuttel에서 집필하였으며 그것을 그의 친구이자 철학자인 Moses Mendelssohn에게 헌정하였다 - 프로그램은 Felix Mendelssohn의 초기 '키리에(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시작하였다.(주3). 그리고는 레씽과 계몽주의가 주창한 모든 것들을 비난한 사람들의 범죄에 대한 증거로써, 쇤베르크의 "바르샤뱌로부터의 생존자"를 이어 연주하였다. 멘델스존의 시대로부터 쇤베르크의 시대로의 도약은 그렇게 역사를 상징화하였고, 이로부터 뒤를 잇는 구레츠키의 3번 교향곡의 연주회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것은 중단이나 갈채가 없는 연주회였고, 도입 메시지나 묵상의 기도도 없었다. 유일하게 인쇄된 것은 브레히트(Brecht)의 시 "An die Nachgeborenen(후세에게)"였으며, 목소리로 표현된 유일한 언어는 쇤베르크의 "생존자"에 나오는 가사이다(주4).

대사의 끝부분에서, 생존자는 사형집행대 하나를 맡고 있는 하사관이 어떻게 자신에게 맡겨진 이름없는 포로들에게 번호를 붙이도록 명령을 했는 지를,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처음에는 느리게, 그리고 점 점 더 빨라져서, "말들의 발굽 소리처럼" 빨라져서는, 그들이 마침내, 그리고 단호한 유니즌으로(그리고 쇤베르크의 합창도 그와 함께) 오랜 유태교의 송가인 "Shema Yisroel(쉬마 이스라엘)"(주5)로 터져나오게 되는 지를 이야기한다.

"바르샤바의 생존자"는 그 어느 정도 조성적인 함의가 경고적이면서도 동시에 긍정적인(positive), 어둡게 빛나는 스포르잔도 화음으로 끝맺는다. 이에 필적할만한 느낌이 성 마그누스 성당이 오늘날 서 있는 바로 그 건축양식에서 또한 감지된다. 원래의 구조물 가운데서, 단지 거대한 13세기의 종탑과 신자들 좌석 통로들의 조각들 몇몇만이 1944년의 공습에서 살아남아서, 그것들만 없다면 단연코 현대 전후(post-war) 양식인 새로운 성당에 긍지를 가지고 통합되었을 것이다.

구레츠키의 (현과 타악기, 피아노, 그리고 하프시코드를 위한)첫번째 교향곡 또한(그러나 -바르샤바의 생존자와는, 역주 - 또 다른 의미에서) 확실히 현대적이다. "1959"라는 부제가 붙은 이 곡은 (그가 말하길) 하나의 새로운 시작의 느낌을 표현한 곡이었다. 이는 그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실제로 그랬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결혼한 해였다), 그리고 폴란드 자체에 대해서도 그러하였다. 폴란드와 그 나라가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자유에 관한 한, 1950년대 말 해빙기에 스탈린의 동상들을 철거하는 것으로 대표되던 기쁨은 단명하고 말았다. 이를 뒤따라 나온 1960년대의 환멸에 대해, 1972년에 작곡된 독창과 합창, 그리고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구레츠키의 2번 교향곡은 목청껏 내지르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이는 성악적으로는 시편과 폴란드의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의 부분들로부터 이루어진 가사에 의해, 그리고 음악적으로는 그 형식과 화음에서의 거대한 궤도를 그리는 진행에 의해 주어진다.

두번째 교향곡의 이면에는 이 때까지 구레츠키의 마음에 걸려 있는 미완의 프로젝트가 남아있었으며, 사실 이는 그의 가족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적인 영역에도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태어났던 마을로부터나, 또는 그가 음악 교육을 받고 자신과 그의 가족이 이십년 이상 살았던 Katowice 시로부터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폴란드-실레지아 산업 지대의 마을들의 완전한 전형으로 보이는, 그러나, 불가항력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아진 마을이 하나 있다. 그 마을의 폴란드식 이름은 언제나 Oswiecim이었으나, 세상에게는 그 독일식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 아우슈비츠(Auschwitz).

성 마그누스 교회 안에서는, "바르샤바로부터의 생존자"의 종결부에서 스포르잔도 화음의 마지막 잔향이 채 사라지기 전에, 오케스트라의 더블베이스가, 깊은 곳으로부터(de profundis), 구레츠키가 그의 위대한 희망의 아치들 가운데 하나를 쌓아올린 길고 느린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 슬픔으로부터 태어났으나, 결코 자신은 슬프지 않은 희망.

구레츠키의 3번 교향곡

1976년의 마지막 세 달 동안 Katowice에서 작곡되어 구레츠키의 아내에게 헌정된 이 교향곡은 그 다음해 4월 남서독일 방송 교향악단(Baden-Baden)에 의해 그 지휘자 Ernest Bour의 지휘로 초연되엇다.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는 모두 당시(그리고 지금도) 가장 "진보적인" 현대 음악의 해석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초연이 이루어진 Royan 페스티벌 또한 이를 지원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작품은 괘씸할 정도로 반동적인 작품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해되기 힘들 정도로 순진한 작품임에 틀림없었다. 이 작품이 실제로 구레츠키의 이름을 지난 이십년동안 아방 가르드 영역 내에 했던 다른 작품들보다 덜 급진적인가 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지만, 최근에 유럽이나 미주에서 열정적인 추종자들을 만들어낸 하나의 작품과는 어떤 지속적 연관성도 없다. 어떤 종류의 선입견도 없는 청중에게는, 그리고 또한 자신의 선입견(사전 지식)을 여전히 더욱 좋은 쪽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음악성을 가진 전문가들에게도, 이 작품은 "설명"이 필요한 그런 작품은 아니다.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곡이 흩뿌리는 빛은 드물도록 밝고 직접적이며, 그 뒤로 계속 들어도 이는 줄어들지 않는다.

첫 악장은 그 중심에 '성스러운 십자가의 비가'라고 알려진 15세기 폴란드의 기도문 가사에 의해 지배된다. 이를 좌우로 대칭이 되도록, 그러나 전치된 관계로, 현악기군만을 위한 두 개의 캐논이 배치되어 있으며, 더블베이스에 의해 시작되고 끝난다. 전반부에서는 기악 성부가 5도 간격의 계단을 타고 도입되어 4 옥타브를 오르게 되고, 결국엔 에올리안 모드(E 장조)의 여덟개의 피치를 모두 아우르게 되는데, 이는 24마디에 걸친 칸투스 피르무스(주6)의 특징이다. 그 기본적인 2성부 버전이던 아니면 그 궁극적인 8성부 버전이건 간에, 이 폴리포니는 어떤 의미에서는 슈톡하우젠(Stockhausen)의 "Stimmung(기분)"(혹은 Terry Riley의 작품 "In C")에 나타나는 단선율(monochord-.-) 만큼이나 정적이고 통일감을 주며,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메시앙(Messiaen)의 고딕풍의 거대한 새장(주7)만큼이나 풍요롭고 들뜬 분위기가 잠재해 있다.

중심기도의 종탑(정점)에 이르러서는, 이 8성부의 폴리포니는 마치 결코 끝나지 않았던 것처럼(어떤 면에서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시작된다. 선율의 하강은 이전과 같이 계단을 밟아 내려오지만, 각각의 불연속적인 계단에서마다 새로운 대위법적이고 구조적인 얼개를 제공하여, 마침내 두 성부로 이루어진 바닥에 닿고, 그 아래에는 무반주의 칸투스 피르무스의 "토대"가 있다.

두번째 악장과 세번째 악장의 아케이드가 그 둘의 합쳐진 길이로써 첫 악장의 구성과 균형을 맞추며, 구조와 느낌, 그리고 템포에서 대비를 이룬다. (구레츠키의 작품에서 빈번히 그런 것처럼)모든 템포들은 겉보기엔 느리지만, 미묘한 변화를 주고 효과를 가미함으로써 느리고 빠름에 대한 기존의 개념이 무색해지고, 새로운 종류의 역동성이 발전한다. 그래서, 이를테면, 두번째 악장이 시작되는 바로 첫 부분에서 생성되는 대비는 메트로놈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거의 무의미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에서 깊이 영향을 미친다. 이는 곧 감옥에서의 기도를 노래하기 시작하는 소프라노의 노래에서 나타나는 대치되는 분위기에 의해 흐려지지만, 그 한 줄기의 생기에 찬 햇살은 그 화음과 분위기 안에 같은 악장의 뒷부분에서 강력하게 재확인되는 약속을 움켜쥔다. 그러나 이약속은 세번째 악장의 끝에 가서야 실현되는데, 거기서 민요의 마지막 구절이 마침내 가 장조의 초월적 광휘를 발견한다.

구레츠키의 3번 교향곡이 연주되고 난 후

오케스트라가 무아의 상태에서 게슈타포의 감옥 벽에 있는 기도로 들어가기 직전에, 성 마그누스 교회의 회중석의 조명은 낮추어져 이었고, 그 상태로 3악장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었고, 3악장이 끝나자 마치 마침음인 가 장조 3화음의 빛나는 잔향을 대비시켜 효과를 드높이기라도 하려는 듯이 모든 조명이 즉시 꺼졌다. 소프라노 독창자와 오케스트라가 어둠 속에 남아있는 동안, 무반주의 합창은 Kurt Hessenberg의 1947년 모테트 "O Herr, mache mich zum Werkzeug deines Friedens(오 주여,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를 노래함으로써 연주회를 끝맺었다. 이 곡이 끝맺을 때, 마치 계시라도 되는 듯한 두개의 깜짝 이벤트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회중석 남쪽 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그 때까지 거의 보이지 않던 스테인드 글래스가 밖의 어둠으로부터 갑자기 빛으로 가득차고, 동시에 고요히 침묵을 지키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청중들의 머리 위 높은 곳에서, 한 때 30년 전쟁의 종결을 알렸던 거대한 종이 크게 울리기 시작하였다.

그 정신적인 면에서 헤센베르크(또는 마틴 루터)보다는 오히려 구레츠키(또는 허만 멜빌)에게 더 가까운, 하눈에 보아도 추상적인 모습이 명백한 성 마그누스 성당의 창문은 복합적인 이미지를 전달해 준다. 그것은, 박해를 피해 탈출하다가 적대적이고 거친 바다의 해안에 발이 묶인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물결이 기적적으로 갈라져서 구원을 받으며, 그 모습이 요나의 고래와 노아의 방주를 동시에 연상케 하는 과정을 통해 횡단을 완수하는 모습이다.

브룬스비크에서였건 바르샤뱌에서였건 간에, 1989년 9월 1일에 열린 기념 음악회들이, 소위 말하는 진지한(serious) 음악의 세계를 우리 자신의 시대의 중요한(serious) 현실들로부터 괴리시키는 쪽으로 작용하는 힘들과 관심들이 언제 어디서나 극복하지 못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어떤 역할 또한 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현실들 가운데 가장 준엄한 것들 가운데에 과거에 대한 우리의 책임들과 미래에 대한 우리의 책무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그런 역할 또한 하지 않았을까?

David Drew

London-Barcelona

Feb. 1992


나의 아들, 선택되고 사랑받는 아이야
너의 상처를 어머니와 나누렴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언제나 너를 가슴에 담아 다니느니
또 언제나 너를 성심으로 섬기느니
어머니에게 말하렴, 그녀가 기쁘도록
비록 이미 너는 떠나고 있으나, 내 가슴에 품은 희망이여.
- 성 십자가 수도원의 Lysagora Songs 모음집 가운데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애가, 15세기 후반

아니요, 어머니, 울지 마세요,
천상의 가장 정결한 여왕이여
언제나 저를 돌보소서
아베 마리아
- 자코파네(Zakopane)의 게슈타포 사령부인 궁전(Palace) 지하의 3번 감방 3번 벽에 새겨진 기도문. 그 아래에는 헬레나 반다 블라주시아코프나(Helena Wanda Blazusiakowna)의 서명이 있으며, "18살, 1944년 9월 26일부터 수감"이라는 말이 있다.

어디로 갔느냐?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아
아마도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잔혹한 적들이 그를 죽였겠지

아, 너희 나쁜 사람들아
가장 신성하신 분, 하느님의 이름으로
내게 말해라, 왜 죽였느냐
나의 아들을?

이제 다시는
나는 그의 부양을 받지 못하리
내가 통곡에 통곡을 하여
내 늙은 눈에서
비통의 눈물이 흘러 내려
오데르(Oder)강이 하나 더 생긴다 하더라도
내 아들을 되살려 놓지 못하리라

그는 무덤 안에 있고
나는 어딘지 알지 못한다
비록 내가 곳곳마다 사람들에게 묻고 다니지만

아마도 그 가련한 아이는
거친 도랑에 누워 있겠지
그렇지 않고 그는
자신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었을텐데

오, 그를 위해 노래하여라
노래하는 하느님의 작은 새들이여
왜냐하면 그의 어미는
그를 찾을 수 없으므로

그리고 너희들, 하느님의 작은 꽃들아
너희들이 모든 곳에서 피어나기를
그리하여 나의 아들이
행복하게 잠들 수 있도록
- 폴란드 서남 Opole 지방의 방언으로 된 민요


주 1 : 베에토벤의 합창 교향곡 4악장의 가사 'Seid umschulungen, Millionen!' - 백만인이여, 서로 얼싸안으라 - 참조 - 역주

주 2 : 아마도 베에토벤은 '합창 교향곡', 말러는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쇤베르크는 '바르샤뱌로부터의 생존자', 그리고 펜데레츠키는 '히로시마의 애가'가 연주되었을 듯 - 역주

주 3 : Lessing은 계몽주의 시대에 종파간의 화합을 주창하였으며, 현자 나탄에서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가 다 뿌리가 같고 서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 - 역주

주 4 : 쇤베르크의 "바르샤바로부터의 생존자"는, 베이스 독창과 합창, 그리고 관현악을 위한 곡이며, 베이스의 나레이션이 주를 이룬다.

 

A Survivor from Warsaw op. 46
Text by Arnold Schönberg

I cannot remember ev’rything.
I must have been unconscious most of the time.
I remember only the grandiose moment
when they all strated to sing as if prearranged,
the old prayer they had neglected for so many years
the forgotten creed!

But I have no recollection how I got underground
to live in the sewers of Warsaw for so long a time.

The day began as usual: Reveille when it still was dark.
Get out! Whether you slept or whether worries kept you awake the whole night.
You had been separated from your children, from your wife, from your parents;
you don’t know what happened to them how could you sleep?

The trumpets again –
Get out! The sergeant will be furious!
They came out; some very slow: the old ones, the sick ones;
some with nervous agility.
They fear the sergeant. They hurry as much as they can.

In vain! Much too much noise; much too much commotion – and not fast enough!
The Feldwebel shouts: »Achtung! Stilljestanden! Na wirds mal? Oder soll ich mit dem Jewehrkolben nachhelfen? Na jutt; wenn ihrs durchaus haben wollt!«

The sergeant and his subordinates hit everybody:
young or old, quiet or nervous, guilty or innocent.
It was painful to hear them groaning and moaning.

I heard it though I had been hit very hard,
so hard that I could not help falling down.
We all on the ground who could not stand up were then beaten over the head.

I must have been unconscious. The next thing I knew was a soldier saying:
»They are all dead«,
whereupon the sergeant ordered to do away with us.
There I lay aside halfconscious.
It had become very still – fear and pain.

Then I heard the sergeant shouting: »Abzählen!«
They started slowly and irregularly: one, two, three, four
»Achtung!« the sergeant shouted again,
»Rascher! Nochmal von vorn anfangen!

In einer Minute will ich wissen,
wieviele ich zur Gaskammer abliefere!
Abzählen!»

They began again, first slowly: one, two, three, four,
became faster and faster, so fast
that it finally sounded like a stampede of wild horses,
and all of a sudden, in the middle of it,
they began singing the Sema’ Yisroel.

[Shema Yisroel - Prayer]

 

- 역주

주 5 : 쉬마 이스라엘 : Hear O Israel로 시작하는 유대인의 신앙고백으로 날마다 드리는 예배에 사용된다 - 역주

주 6 : Cantus firmus : 정선율, 다양한 다성음악적 변용의 재료가 되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정선율 - 역주

주 7 : 메시앙의 독주 피아노를 위한 7권 13곡의 "새의 카탈로그(Catalogue d'oiseaux)" - 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