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helm Furtwaengler

모든 위대한 것은 단순하다

Amadeus 2008. 10. 15. 11:34

 
 

Wilhelm Furtwängler
(1886년 1월 25일- 1954년 11월 30일)


모든 위대한 것은 단순하다


주 : 원래의 번역본에서 "관능"이라는 단어를 모두 "감각"이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그 외에도, 다른 자료와 마찬가지로, 일본어를 번역한 원래 자료에서 드러나는 일본식 표현의 잔재들을 모두 적당한 우리 말로 바꾼다고 하긴 하였지만, 미처 의식하거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것을 발견하시면 주저하지 마시고 제게 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말의 전개가 그리 매끄럽지 못하거나 혹은 이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몇몇 부분은 원래의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언젠가 원본을 입수하여 직접 번역함으로써 푸르트뱅글러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술가를 위한 격언

 

사람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이 격언이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역시 자연스러운 단순한 인간에게는 즉석에서 이해할 수 있는 예지를 어김없이 가진 잠언이다.

하지만 이 잠언은 오늘날의 사상가들에게 약간의 의혹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 모든 위대한 것은 "단순"해야 하는가? 우리의 기술시대에는 아무래도 맞지 않는 말이 아닐까?

우리 시대에 들어와서 세계는 그 상호관련성이 얼마나 복잡해질까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무한무궁함은 틀림없이 "단순성"에 대한 최대의 반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기계를 조립하는 것을 배운다. 이것이야말로 복잡성의 놀라운 작품이 아니냐. 이것을 위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위대함은 차라리 복잡함 속에 있지 않을까? 여기서 더 자세한 말을 하자면 "모든 위대한 것은 단순하다"는 잠언은 예술가를 위한 잠언인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이 아직 시대의 본질적인 중요한 표현으로서 가르쳐지고 있었던 시대의 예지에 의해서 말하여진 것이다. 오늘의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우리는 "테크닉"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과학의 시대에 들어섰다 - 과학의 덕택으로 기술이란 것이 태어났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말은 겉만 보고 하는 소리이다. 이러한 일들의 배후에 숨어 있는 내부의 변혁이 얼마나 심각한가는 아직 하나도 의식되지 않고 있다. 혹은 그것은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에 아직 우리의 의식에 비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모든 위대한 것은 단순하다." 이것은 예술가를 위한 잠언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 "단순"이란 말이 "전체"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이란 "모든 것을 뚫어보고" 갑자기 일거에 바르게 그 전체를 파악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의 "전체"란 결코 그저 그 자체를 위해서 분리된 세계의 일부분이란 뜻만은 아니다. 세계의 일부분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은 이 세계를 그 "전양태"로서 반영하는 부분이다. "전체 속에 마신적인 것이 존재하고 있다"고 예술가 괴테는 말하였다.

비유기적 세계는 이 "전체"를 모른다. 비유기적인 세계는 한계라는 것을 갖지 않고 그저 무한히 넓어져 가려고만 한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의미의 전체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인간으로서 유기적인 생명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 의해 가까와진 우주

 

하나의 "전체"는 이와 같이 "단순"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전체"로서 본다는 것은 이미 그것을 단순화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것은 단순하다"는 말은 우리가 "위대"하게 느끼는 것은 모두 유기적인 세계에 속해 있다는 뜻이 된다.

어쨌든 이런 일은 오늘날의 인간에게는 정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으리라. 중세의 사색을 독차지하고 있던 이 유기적 세계와 대등하게 등장한 것이 비유기적인 세계이다. 대 우주 자체가 과학에 의해서 우리의 신변 가까이까지 당겨져 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외부세계를 놀랄만큼 변화시켜 버린 과학적인 사색은 우리의 내심의 생명에까지 들어서서 더욱 중대한 역할을 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가지는 우리들로서 가장 깊고 친근한 일로 생각되어 오던 예술이나 종교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깊은 영향을 주고 그것을 변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예술이나 예술가의 생활에는 이때까지 인류의 역사가 모르던 문제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을 시기를 놓치지 않고 알아채는 것이 예술가로서 중요한 과제가 된다.

예술가는 창작함으로써 산다. 이 "유한"한 유기적인 형체 속에 "무한"한 창조적인 자연을 담아 넣은 작품을 뒤이어 창작해냄으로써 산다. 예술가로서 필요한 것은 한편으로는 "전체"가 갖는 은총이며 직관이다. 또 다른 편으로는 이 직관을 생생한 피가 흐르는 현실 속에 담아 넣는 작품의 현실로 몰아 놓기 위한 - 강인한 힘이다.

 

20세기 이후의 대변혁

 

개개의 작품에서 예술가의 노력이란 어떤 실현을 하려고 하기보다 그의 직관을 감각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이 열광적인 노력과는 달리 과학적인 사색은 한정된 관심밖에 없다. 왜냐하면 과학은 처음부터 개별적인 경우를 하나도 문제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갖가지 개별적인 것의 상관, 전형만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으로 본다면 예술가의 창조란 것은 너무나 쓸 데 없는 표면적인 현상을 "과도하도록 중대하게 받아들이는" 일이다. 순수한 감격적인 외부적인 일에 너무나 빠져 있다고 할 지 모른다.

예술가는 끝없이 새롭게 밀려드는 과제, 개개의 경우를 극복하려는 숙명을 갖는다. 이 과제에서 자기를 멀게 하는 모든 것들을 그는 페스트처럼 피해야 한다. - 예술가는 그러한 과제로부터 오는 매력을 "길(Routine : 일상)"이라고 부른다. - 그러나 과학적인 사고는 개별의 것들을 결합하는 현상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단순한 매력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의무라고 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부른다.

"니체"는 이 문제를 철저하고 엄밀하게 추구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젊었을 때 바그너의 영향 아래 예술의 필연성을, 즉 가현상이 갖는 필연성을 인정하려고 하였다. 그는 적어도 아직 음악이 힘과 현상을 소유하고 있던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뒷날 그는 자기 위치를 대두하는 과학시대의 철학자로서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젊었을 때의 직관을 타파하게 되었다. 뒷날 그는 바그너를 물어뜯으며 공격하였다. 바그너는 과학이 세계지배를 시작한 시대에 남겨진 고독한 예술가였다. 그러므로 그는 근본에서 비계절적이었으며 동시에 보다 깊은 의미에서 계절적이었다. 그런만큼 니체의 공격은 한층 아픈 것이었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음악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과학적 사고만이 일변도로 끝없이 부풀어가는 나머지 그밖의 모든 것을 희생해 버렸다는 데에 있다.

20세기 초의 2, 30년 동안이란 음악에서 아직 전세기의 위대한 음악적 공적의 그늘 안에 있었다. 당시 유럽의 음악계는 아직 백화만발의 화원에나 견줄 수 있는 것이었다 - 갖가지 잡초가 그 사이에 돋아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참으로 아름다운 꽃이 피는 화원이었다. 또 거기에는 이 세기를 꿰뚫어 다음 대까지 피어나는 새로운 사람들도 있었다. 드뷔시, 라벨, 레가, 피츠너, 그리고 초기의 스트라빈스키 등등. 사람들은 아직까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상황이 아주 딴판으로 바뀌어 버렸다. 지금 "계절적"이라고 불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작곡가가 걷는 길이란 더욱 좁고 황량하고 쓸쓸한 것이 되었다.

음악의 생명을 뒤흔드는 이 변혁은 그저 작곡가들에게만 미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실제로 음악을 연주하고 지휘하는 음악가들도 이 변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전에는 지휘자나 피아니스트 등의 노력은 그저 위대한 작품을 풍부한 생명력을 가지고 재현하는데 쏟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열정을 가지고 그러한 위대한 작품을 완전히 믿었기 대문이다. 그 때는 아직 "영웅 숭배"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그런 것은 이미 정복이 끝난 것으로서 완전히 멸시하고 있다. 오늘날의 평범한 연주를 들어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오늘의 세계에서는 이런 작품들은 갑자기 아무래도 좋은 흥이 깨진 것이 되어 버렸을까? 아니 그러나 작품이 바뀐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 인간이 - 청중이라는 대중이 - 바뀐 것도 아닐테고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냐?

 

체험 대신에 지배를 원해

 

오늘의 사고법, - 그것은 많건 적건간에 벌서 누구 하나 벗어날 수가 없다. - 그것이 이토록 큰 영향을 줄 수 있게 되었을까?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자 한다. 전에는 베에토벤은 - 위대한 예술가이고 성자이고 우리 자신 속에도 신성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은총을 담은 그릇이었다 - 그것은 베에토벤이 아니라 다른 작곡가의 이름을 놓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 말 그대로의 정확한 뜻에서 종교적이라고 해도 좋은 현실이었다. 그는 바그너에게도 브람스에게도 말러에게도 그러한 신적 현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베에토벤은 이미 그토록 깊은 의미를 가지고 존재하지 않는 것같다. 나는 여기서 잘못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오늘의 세계는 베에토벤의 작품을 아무 저항도 없이 솔직하게 받아들인다. 전에는 그런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베에토벤은 무엇보다도 우선 "빈의 고전 작곡가"이고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물론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 직접의 연결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베에토벤의 음악을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전에 생각하고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베에토벤의 본질이다, 아니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베에토벤의 전부이다라는 따위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일이 이렇게 된 근본의 이유는 더 깊은 곳에 있는 지도 모른다. 오늘의 우리가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전체의 전망이 중요하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물을 높은 곳에서 조감할 수 있는 입장에서 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개개의 예술작품을 "체험"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하자면 그것에 내 몸을 맡겨버리는 따위는 하지 않게 되었다. 차라리 그저 그것을 상관관계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지식"으로 삼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지배하려고 한다. 이것은 즉 과학이 쓰는 방법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 예술가로서 문제가 일어난다. 이런 방식을 밀고 가면 대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는 것이다. 음악의 생명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결코 그저 오늘날 우리는 어떤 것을 작곡하느냐 하는 것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의 생명은 우리가 과거의 음악을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체험하느냐,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 연주하느냐 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뚜렷하게 의식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연주는 밑바닥에서부터 달라졌다. 베에토벤의 작품의 표현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말했다. 오늘의 음악계는 이제 하나하나의 작품에 그렇게까지 깊이 파고들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도리어 오늘날의 추상이나 이론에 치닫는 사고법에 대응하는 것같은 일반적인 어떤 종류의 선에 따라서 작품을 재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만일 어느 작품이 "고전"의 것이라면 사람들은 그것을 "양식에 맞게 연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는 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방법은 한가지 만을 놓치고 있다. 즉, 현대의 인간으로서 작품과 대결한다는 문제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또 "양식에 맞게"라는 말 속에는 특히 "그 작품이 생겨난 시대의 양식에 충실하게"라는 뜻이 들어 있다. 루드비히 베에토벤이라는 인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우선 아무래도 좋고 차라리 "빈의 고전작곡가" 베에토벤이 그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느냐를 연주에 나타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에토벤이란 인간 속에야말로 저 주관적 낭만주의적인 태도가 나타나 있는 것이다.) 전에 베에토벤의 작품 속에 위대한 문제라고 생각되었던 여러 가지 의문들은 - 사실 매우 건축적인 이 음악은 무수한 문제를 제공하고 있다 - 오늘날에는 말하자면 벌써 저절로 해결되어 버린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베에토벤의 작품은 오늘날은 이미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베에토벤이 어떻게 연주되든 그것은 이미 우리 생활에 중요하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된 것이다.

바그너가 베에토벤의 이야기라면 도취한 것처럼 정신없이 좋아한 것은 사람들이 잘 아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이른바 과학이라는 파벌의 물을 먹은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 믿을 수 없는 놀라움을 느낀다. 베에토벤보다도 그렇게 한 바그너라는 인간에 놀라는 것이다. 오늘은 대체로 어느 예술작품에 "도취"하는 따위가 시류에 벗어난 짓인 것이다. 그런 것은 역시 이미 극복된 19세기의 낭만주의에 속하는 것일까.

 

추방되고 박해받는 직관

 

여기서 똑똑히 말해 두고 싶다. 그것은 첫째로 과학적인 세계의 고찰과 예술적인 세계의 고찰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확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고찰법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병존할 수 있고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단독으로 세계를 대표하거나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주권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두 고찰법은 어느 것이나 주도권을 갖겠다는 따위의 요구를 꺼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것을 더 깊이 캐본다면 이 두 고찰법의 구조 속에 그 이유가 발견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 하나는 살기를 바라고 다른 하나는 지배하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탐구하고 생명 이외의 아무 것도 탐구하려고 하지 않는 예술가는 과학자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자기를, 또 자기의 작품을 흐름에 맡기고 사람에게 몸을 맡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어지는 예술의 감명이나 그 전개를 문제 삼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특히 오늘날 - 과학자가 물고 늘어지는 요점이 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과학자의 의미에서 물고 늘어지는 것이지 예술가의 의미에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은 예술이 흔히 마치 어�게 연주하면 좋은가, 어떻게 작곡할 것인가, 전혀 방향이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느낌이 있다. "과학"의 인간은 청중은 아니지만 일반의 의견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 예술가를 향해서 편견을 떠맡길 만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베에토벤의 경우에서도 말했지만 연주에 대한 요구가 전혀 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의 연주가 자유와 순정을 잃어버린 그 정도는 매우 심각하다. 그리고 매우 미세한 세부에 이르기까지 의식적이 되고 무엇인가 정해진 형상이라든가 방법같은 것에 지배되고 있다. 그러한 것이 개개의 작품에 강요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작품과는 도대체 아무 연결도 없는 것이 많다.

과거의 위대한 작품은 고도의 직관 위에 서 있다. 그런데 오늘의 연주에서는 그러한 직관을 바르게 나타내는 일은 하지 않고 모든 수단을 기울여 그것을 추방하고 박해하려고 한다.

작곡된 작품의 내부에서 "직관"이란 무엇이며, 무엇일 수 있느냐. 대부분의 오늘날 사람들은 이제 모르는 모양이다. 이전보다도 사람들은 무엇이고 "배울"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믿는 한 편, 연주 때 일어날 수 있는, 혹은 언제나 일어난 실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이름조차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가령 그것은 악절법(Articulation)에 대해서 그러하며, 또 악보에는 어떻게 기재할 방도가 없는 악절 상호간의 연결의 문제가 그렇다. 셰익스피어의 극에 대한 "아티큘레이션" 따위는 어쨌든 위대한 배우에 의해서 원문에다 가필해서 인쇄되는 것이지만 이 일이야말로 바로 리스트가 저 유명한 그의 "교향악적 시작"의 서문에서 처음으로 지적한 일이다.

"동시에 여기에 첨가해서 말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아직도 각처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저 기계적이고 박자가 건성인, 조각 조각 끊어져 나간, 우쭐해서 하는 연주, 맥락을 못잡는 연주는 될수록 거부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특수한 액센트만을 드러나게 하고 멜로디와 리듬이 그리는 색채를 완성시키는 연주만을 사실을 파악한 연주로서 인정하고 싶습니다."

 

구두쇠가 되어버린 사람들

 

하나 하나의 악절의 연관이라는 문제 다음에 다시 절대음악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서 구성과 건축의 문제가 있다. 이것도 이제 오늘의 우리에게는 대부분 어디엔가 잊혀진 것이 되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레코드나 라디오를 들음으로써 만연하게 된 저 잘 못 인식한 그릇된 음감, 정신이 빠져 나간 그저 껍데기만 발라 맞추려고 하는 단순하고 깨끗한 소리를 좋아하는 귀 - 등이 첨가되게 된다. 거기서는 음악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것들이 습관화되어 왔다. 그것은 마치 뒤러의 스케치풍의 미래화적인 기술만을 써서 그것에 맞는 그림을 그리려고 할 뿐 아니라 - 모든 그림을, 가령 램브란트나 티치아노의 그림까지도 재현하려고 하고 그렇게 재현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일과도 같다.

각기 다른 시대, 예술가 아니 대개의 경우 모든 작품 자체가 각각 다른 음조를 이상으로 해서 출발하고 있다. 그런 일은 이제 생각하는 사람도 없게 되었다. 도리어 그 반대로 사람들은 모든 이들 천차만별의 작품을 그저 언제나 배운 것이라고는 그것 뿐인 "악보에 충실하게"라든가 "양식에 알맞게"라는 구호를 가진 연출로서 대강대강 연주를 마쳐 버린다. 참으로 이론만세이며 그 내용이 엉뚱하고 유치하면 할수록 더욱 대중의 환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렇게 엄청난 구두쇠가 된 것인지 아직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음악의 생명이 얼마나 따분한 것이 되기 시작했는지 모르는 것일까? 어떤 유행의 젊은 작곡가가 모짜르트나 베에토벤은 박물관에 갖다 놓으면 알맞고 바그너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분명 어느 신선한 명확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지만 결국 일반에 넓게 퍼진 음악이 가져온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여기서 차차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물을 보는 안목에 대해서 말하자면 "음악의 분열"이라고 하겠다. 한편에는 이른바 조성음악이라는 음악의 시대를 포함해서 슈트라우스, 라벨, 초기의 스트라빈스키에서 끝이 나는 고전의 음악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 무슨 이유에서였든 하여간 갑자기 죽어 없어져 버렸다. 다른 편에서는 신선한 그 대표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완성보다는 차라리 주로 희망을 던져주는 것처럼 생각되는 음악이 대립하고있다.

하나의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음악사가로서 확신하는 바이지만,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는 음악의 자연스런 발달을 바랄 수가 없다. 어제까지 생생하게 생명을 간직하던 예술이 오늘 갑자기 사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아무리 많은 빈틈없는 지식인들이 그것을 확신하고 있을망정, 또 어제까지 생생하게 활동을 해온 것도 아닌 예술이 죽음을 선고받은 예술을 대신해서 갑자기 오늘의 예술로 그 기능을 완성할 수도 없다. 설령 같은 빈틈없는 지식인들이 열심히 그것을 희망한다고 할지라도.

니체 이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든 사물의 기준이라고 느끼면서 그것을 밀고 나가는데 길들여져왔다. 이것도 역시 과학적인 사고법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실은 또 그 역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앞에 나와서 잘못된 것은 하필이면 반드시 베에토벤 혼자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베에토벤 앞에 나와서 도리어 우리들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신문은 대중의 설득자

 

오늘날 우리는 도처에서 그저 머리 속에서 생각해 냈을 뿐인 불행한 의미없는 나열이 체험된 현실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고 있는 사실을 본다. 전에는 가령 신문 같은 것은 대중과 예술가 사이에 다리를 걸어주는 것을 그 과제로 삼아왔다. 물론 대중의 동향이란 것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예술작품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과 이 양편에서 예술과 예술가의 종합된 감동 전체를 끌어 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늘날 신문은 어느 사이에 대중의 후견인, 대중의 설득자로 바뀌어 버렸다. 대중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이 강대한 과학을 대표하는 사람들에게는 - 신문을 대표하는 많은 사람들도 그에 소속하는 셈이지만 -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대중이 실제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대개 사회자에게 뿐이다. 그것은 즉 - 대중이 어디까지 따라 오느냐, 얼마나 모이느냐 하는 것 뿐이다. 새로운 작곡의 의미에 대해서 혹은 해석의 보다 깊은 의미에 대해서 대중은 이미 아무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하여간 대중은 지도권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안가는 이상한 일이다. 오늘날에도 역시 음악회라든가 연극의 공연은 무슨 형태든 "공동의 체험"과 같은 것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일은 적어도 그 과제를 의식한 신문에 의해서 강조되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전문적인 신문이 내는 규정된 일정한 방향, 이론, 방법론 따위 일변도의 논조와 반대의 반응을 대중이 나타낸다고 하는, 오늘에는 드물지 않은 여러 경우가 생각난다.

감각적, 단적인 음악의 효과 - 그것은 모든 음악작품의 일면이라고 생각되는 것이지만 이론적인 고찰에서까지 묵살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이 효과를 어떻게든 가치적으로 끌어 내리려고 열중하는 패들은 있는 것이다. 일변도에 충실한 오늘날의 음악가들은 "감각적인 음악", 가령 바그너 등을 원리적으로 거부한다. 피아니스트 중에서도 -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조차도 - 같은 근거에서 쇼팽의 곡에는 손가락 하나를 대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나 오늘날의 일반 사람들은 다음 사실을 하나도 모른다. 위대한 예술 작품이나 예술가에게는 감각과 정신 사이에 아무 거리도 없고, 있을 수 없고, 또 있어서도 안된다는 사실 말이다. 정신의 감각화 - 이것이 무엇인가를 똑똑히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 가 그의 과제인 것이다. 그리고 똑같이 감각의 정신화도 그는 과제로 삼고 있다. 예술가로서는 감각이 따르지 않는 정신은 희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신이 없는 감각도 받아 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다. (어쨌든 이 둘이 오늘날 분리되고 있다. 그 예를 찾자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바그너와 쇼팽이 만일 실제로 "새로운 감각" 이외의 아무 것도 가져오지 못했다면 벌써 옛날에 결정적으로 걷어 치워져 버렸을 것이다.

비감각화의 가장 치명적인 예를 말하자면 이른바 12음계 작곡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사실 "과학적"인 인간의 권력행사의 수단인 "방법론"이 최대한으로 확장되어 예술가의 방법인 직관에까지 감각화라는 영역까지 도달했다. - 그 의미에서 감각은 최소한도에까지 축소되었다. 방법만 올바르면 우리가 구하는 근대예술은 아무 힘도 안들이고 창작할 수 있다는 생각은 19세기만 하더라도 매우 멸시를 받고 도저히 이해될 수 없었던 관념이었다. 이런 예를 보더라도 일반의 생각이 얼마나 심각하게 결정적으로 바꾸어졌느냐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가 있다.

 

이론가와 예술가 사이의 싸움

 

오늘날 12음계 작곡은 작곡가들에게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거의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일면에서는 참으로 지난 세기에 존재한 음악의 역사화이고 평준화이고 가치절하이며, 다른 면에서는 어떤 종류의 이론적 도그마에 순응하려는 미래 음악에의 요망의 선언이기도 하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입장을 철두철미 바꾸어 버리는 결과가 된다. 예술가는 이미 신의 은총을 받은 그릇이 아닌 것이다. 갈등에 대한 두려움의 생각은 소멸해 버렸다. 만일 예술가가 어떤 의미의 지배적 사상 관념의 테두리에 스스로를 가두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예술가로서 매장되거나 혹은 가차없는 박해를 받거나 추방되어 버린다. - 비록 그 밖의 점에서 아무리 뛰어난 일을 할지언정 "은퇴한 낭만파"라는 이름 아래 처리되고 만다.

그래서 그런 꼴이 되는 자기자신을 보기가 싫어서 자기 고국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위대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도 있다. 이런 일은 이른바 "후계자"의 양성에 대해서 당사자들은 특히 치명적인 불행이 될 것이다. 후계자들에게 올바른 출발이 되어질 까닭이 없다.

요약해서 말하면 이미 12세기에 이른바 유명론자와 실험론자 사이의 싸움이 있었다. 지배하려는 이론가와 살려고 하는 예술가 사이의 싸움이 오늘날 음악에서 다시 불꽃튀기는 충돌을 했다고 하겠다. 이 싸움은 우리 시대의 귀결, 광신적 이론적인 시대, 과학이 종교로 된 시대의 결말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예술가는 이러한 상황을 늦기 전에 분명하게 파악해 두지 않으면 당장에 "예술"로서의 음악 따위는 버려지게 되리라. 이 대규모의 싸움은 바그너에게 던져진 니체의 소책자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첫 봉화였다. 이후 이 싸움은 10년, 또 10년, 세기가 진행될 때마다 격화되어 왔다. 참으로 생명의 위험을 가져온 이 위기는 유일한 방법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가 있다. 이것만은 분명하게 해두고 싶다. 여기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여기서는 단 한 가지의 방법만이 효과가 있다. 즉 청신한 생명있는 것을 요구하는 지식인들이 - 그들이 제출한 요구는 언제나 정당했지만 - 보다 더 지성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예술과 예술가의 가공의 상으로서 휘두를 것이 아니라 - 적어도 오늘을 위한 - 밑바탕이 되도록 모든 사람들 옆으로 내려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비싼 값으로 산 역사적 전망을 지침으로 써야 하며 지배하기 위해서 사용하면 안된다. 예술작품이라는 불회귀의 일을, 그것은 직접 우리에게 관한 일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관련과 똑같이, 아니 차라리 그 이상으로 존경해 주었으면 싶다. 위대한 것에 대한 사랑, 아무 조건도 붙이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을 갖기를 다시 한 번 익혀주었으면 싶다. 그것은 마치도 바그너의 파르지팔의 경우와 똑같다. "주어진 상처는 다만 그 상처를 준 무기만이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일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저 일변도의 사상의 무서운 작용은 오로지 보다 높은, 보다 포괄적인 사상만이 극복할 수가 있다. 진실한 예술은 오로지 - 상대적인 의미에서 - 순진한 분위기 속에서만이 자랄 수 있다. 이 순진함으로 하여금 제 2의 순진함을, 오로지 우리 시대에 적응할 예지의 순수한 마음을 나는 오늘을 책임지는 사람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이다.

(1954)